경복궁 근정전 바닥은 왜 검을까? [안영배의 도시와 풍수]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1월 8일 09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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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하늘 별자리를 지상에 옮긴 천문(天文)도시(下)
근정전 일월오봉도와 칠조룡에 숨겨진 비표
교태전은 삼신이 사는 자미원의 핵심
종로는 천시원, 세종대로는 태미원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 근정전. 사진은 2011년 근정전에서 진행된 고유제 장면이다.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 근정전. 사진은 2011년 근정전에서 진행된 고유제 장면이다.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경복궁을 상징하는 건물인 근정전은 온통 불그스름한 자주색이다. 건물을 지탱하는 내외부의 기둥, 왕이 앉는 용상 주변이 모두 붉은 색이다. 반면 근정전 내 넓은 바닥은 한결같이 거무스름한 빛깔을 띠고 있다. 흙을 네모반듯하게 구운 방전(方塼)을 깔아놓은 것으로, 조선왕실을 대표하는 근정전에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으로 여기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는 오해다. 심오한 뜻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근정전은 하늘의 으뜸 별자리인 자미원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전각이다. 근정전을 오르는 돌계단의 소맷돌에 새겨진 구름무늬부터 근정전이 구름 위의 하늘 궁전임을 암시한다. 근정전의 돌계단 사방에 동쪽하늘의 별자리를 상징하는 청룡, 서쪽 하늘의 별자리 백호, 남쪽 하늘의 별자리 주작, 북쪽 하늘의 별자리 현무 조각상을 배치한 것도 같은 이유다.



근정전 내부를 들여다보면 바닥이 마치 어둑한 허공처럼 보인다. 근정전 돌바닥이 북극성과 북두칠성이 있는 자미원 공간임을 거무스름한 색(玄)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 공간에 세워진 불그스름한 나무기둥과 용상은 자미원(紫薇垣)의 이름 그대로 자색(紫色)을 상징한다. 중국 명나라 때 건설된 베이징의 자금성도 자미원을 모방해 자색이 주류를 이룬다. 한반도의 통치자들은 오래전부터 천손(天孫)이라는 의식이 강했다. 삼국과 고려에서도 당시 왕들은 자색 옷을 입고, 자신이 하늘임금의 대행자임을 알렸다.

자색을 임금의 색깔로 표현한 것은 서양도 마찬가지다. 로마제국 시절 자색은 ‘임페리얼 퍼플(imperial purple, 황제 자주)’로 불리며 오로지 황실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다. 동로마제국 황제의 자식들은 대대로 콘스탄티누스 황궁의 자주색 건물 방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고귀한 태생(born in the purple)’으로 불리기도 했다.

● 근정전 일월오봉도에 나타난 메시지
근정전 내 자색 빛깔의 용상과 기둥들. 용상 뒤로는 일월오봉도가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안영배 논설위원
근정전 내 자색 빛깔의 용상과 기둥들. 용상 뒤로는 일월오봉도가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안영배 논설위원
근정전을 자미궁궐로 보면 전각 내 많은 구조물의 숨은 뜻이 드러난다. 근정전 용상 바로 뒤에 펼쳐진 ‘일월오봉도(일월오악도)’가 대표적이다. 하늘의 자미원에 사는 천제(天帝)는 북두칠성이라는 수레를 타고 사방에 포진한 28수 별자리를 살피고 다스린다. 이를 칠정(七政)이라고 한다. 칠정은 대체로 28수를 관할하는 북두칠성을 상징하며, 태양계의 해와 달과 오행성(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의 운행을 가리키기도 한다.

천제의 지상 대행자인 임금은 우주의 운행질서인 칠정을 본받아 올바른 정치를 펼쳐야 한다. 그게 일월오봉도의 숨겨진 뜻이다. 실제로 일월오봉도에서 보이는 청록색 다섯 봉우리의 산 및 해와 달을 합치면 칠정을 의미하는 숫자 7이 나온다. 풍수에서는 산을 성봉(星峰)이라고 보고 별의 화신으로 여기는데, 일월오봉이 7개의 별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일월오봉을 자미원의 북두칠성으로 이해하는 이도 있고, 일월(日月)과 오행성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혹은 자미원의 임금 별자리(오제좌) 뒤를 병풍처럼 가려주는 화개성(華蓋星·7개 별로 구성)으로 보는 이도 있다. 어느 것이든 일월오봉도가 하늘의 별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근정전 천정 위의 칠조룡. 발톱이 7개인 칠조룡은 황제를 상징한다. 안영배 논설위원
근정전 천정 위의 칠조룡. 발톱이 7개인 칠조룡은 황제를 상징한다. 안영배 논설위원
근정전 천정에는 황제나 임금을 상징하는 황금색 용 두 마리가 여의주를 가운데 두고 희롱하는 그림(이룡희주·二龍戱珠)이 새겨져 있다. 이 역시 우주를 표현한 것이다. 용의 발톱이 그 단서다. 근정전의 용 두 마리는 발마다 7개의 발톱을 가지고 있어 ‘(七爪龍)’으로 불린다. 용 두 마리의 발톱은 모두 합쳐 28개(4X7)다. 바로 조선의 왕(용)이 천하(하늘의 28수 별자리)를 통치하고, 조선이 천자국임을 보여주는 ‘비표’인 셈이다.

왕비의 처소인 교태전. 경복궁 궐내에서 가장 기운이 좋은 터로 평가된다. 안영배 논설위원
왕비의 처소인 교태전. 경복궁 궐내에서 가장 기운이 좋은 터로 평가된다. 안영배 논설위원
근정전을 지나쳐 북쪽으로 직진하면 왕이 평상시 머물면서 정사를 돌보는 사정전과 왕의 잠자리인 강녕전이 있고, 강녕전 바로 뒤에 왕비의 처소인 교태전이 있다. 자미원 궁궐 중에서도 가장 고갱이가 교태전인데, 우주의 중심에 해당하는 별인 북극성을 상징한다. 왕비의 처소를 중심에 둔 것에서 고대인들의 독특한 하늘 세계관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북극성이 뭇 생명을 주관하는 삼신(혹은 삼신할미), 마고신, 북신묘견 등 여성을 상징한다고 여긴다. 풍수적 관점에서도 경복궁에서 최고의 명당 혈자리는 교태전이다.

경복궁 영제교 다리 밑으로 흐르는 물도랑인 어구. 자미원에는 반드시 어구가 존재해야 한다. 안영배 논설위원.
경복궁 영제교 다리 밑으로 흐르는 물도랑인 어구. 자미원에는 반드시 어구가 존재해야 한다. 안영배 논설위원.

경복궁 흥례문과 근정문 사이에 설치된 영제교 다리 밑으로 흐르는 물도 경복궁이 자미원의 궁궐임을 보여준다. 이 물 도랑은 인왕산 자락의 물과 궁궐 북쪽의 물을 끌어들여 궁궐 남쪽을 동서로 흐른 뒤 동십자각 옆 수구(水口)로 빠져나가도록 설계돼 있다고 한다. 이 물도랑을 어구(御溝)라 부른다. 고전 풍수서 ‘인자수지’는 “자미원 가운데로 물이 지나가고 있는데 이름을 어구라고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어구가 있는 곳이 자미원이라는 뜻이다.

● 태미원은 세종대로, 천시원은 종로와 남대문길
태미원 자리인 세종대로(남북방향)와 천시원 자리인 종로(동서방향). 종로대로(사진 하단) 좌우를 중심으로 시전과 육의전 등이 세워져 백성들의 경제활동이 이뤄졌다. 동아일보 DB
태미원 자리인 세종대로(남북방향)와 천시원 자리인 종로(동서방향). 종로대로(사진 하단) 좌우를 중심으로 시전과 육의전 등이 세워져 백성들의 경제활동이 이뤄졌다. 동아일보 DB

한양에 도읍지를 정한 조선왕조는 경복궁과 4대문 안쪽 즉 한양도성 내부를 자미원으로 설정하고, 그 외곽으로 천시원(광진구 일대)과 태미원(은평구 일대)을 배치함으로써 서울이 3원을 갖춘 하늘도시라는 점을 드러냈다.

조선왕실은 또 한양도성 내 자미원 영역에도 3원을 뒀다. 먼저 임금과 그 가족이 사는 경복궁은 자미원 궁궐에 해당한다. 자미원 하단의 태미원은 궁궐의 남쪽에 해당한다. 경복궁 남쪽 정면의 육조거리, 지금의 세종대로 일대가 당시 행정을 집행하는 정부기관이 들어선 태미원 영역이다. 태미원은 하늘나라의 정부종합청사가 있는 곳이다. 이론과 실제가 맞아떨어진 셈이다.

문제는 백성들의 경제 활동지인 천시원 자리였다. 유교적 배치법에는 ‘궁궐 뒤쪽에는 시장(後市)’이 들어서야 한다. 하지만 경복궁 뒤가 바로 북악산으로 이어져 시장을 조성할 공간이 없다. 종로와 청계천 일대에 시전과 육의전 등 시장 구역이 만들어진 이유다. 하지만 천시원 자리 역시 천문도상의 3원 배치법에 따라 조성됐다. 천문도에서 천시원은 자미원의 왼쪽에 붙어 있는데, 이것이 지상으로 투영되면 자미원 오른쪽에 해당된다. 바로 종로와 청계천 일대가 경복궁(자미원)의 오른쪽에 자리하고 있다.

1920년대의 종로. 천시원 자리인 종로는 조선 건국 이후 600년이 넘도록 한국경제의 중심 역할을 해왔다. 동아일보 DB
1920년대의 종로. 천시원 자리인 종로는 조선 건국 이후 600년이 넘도록 한국경제의 중심 역할을 해왔다. 동아일보 DB
조선 태종 때 만들어진 한양의 대표적인 상가인 운종가(雲從街)는 조선시대 경제의 핏줄 같은 역할을 했다. 사람과 재화가 구름같이 몰린다 해서 붙여진 이름인 운종가는 T자형으로 설계됐다. 종로 1가부터 동대문으로 이어지는 동서방향의 종로 거리와 종로 2가의 종루(종각)에서 명동을 거쳐 남대문으로 이어지는 남북방향의 도로가 핵심구역이었다. 상인들은 길 좌우로 기다랗게 시전행랑을 짓고, 경제활동을 했다. 종로와 명동 일대는 600년 넘는 현재에도 서울의 경제 핵심지로서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이 일대는 풍수적으로 보아도 재물 기운이 왕성한 터다. 하늘의 이치와 땅의 지리가 이처럼 맞아떨어지는 곳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경복궁에서 바라본 세종대로. 광화문(가운데) 바깥 좌우로 의정부와 육조 등 조선 정부 기관들이 들어섰다. 안영배 논설위원
경복궁에서 바라본 세종대로. 광화문(가운데) 바깥 좌우로 의정부와 육조 등 조선 정부 기관들이 들어섰다. 안영배 논설위원
지상에 최고의 천문도시를 조성한 자미궁궐인 경복궁은 아직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지 못했다. 경복궁보다 늦게 지어진 중국의 자금성은 이미 세계문화유산에 이름을 올렸다. 경복궁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받지 못한 데에는 자금성에 비해 규모가 작고 자금성과 유사한 건축 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이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위원회에 경복궁의 진정한 가치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우리의 책임이 크다. 경복궁은 평평한 평지에다가 인공으로 상징 조작한 자금성과는 달리 산세와 지형을 최대한 살려 진정한 하늘 궁전의 세계를 지상에 펼쳐놓은 자연과 인간의 위대한 합작품이다.

안영배 논설위원oj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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