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보’(1986년)로 데뷔해 34년간 영화 38편에 출연했지만 김혜수(50)에게는 여전히 작품을 결정하게 되는 ‘운명적 계기’가 있다. 12일 개봉하는 ‘내가 죽던 날’(박지완 감독)도 그랬다. 시나리오를 접한 것은 수년 전 그가 삶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을 지날 때였다. 8년 전 연을 끊은 어머니의 억대 채무 문제가 다시 불거졌을 때. 자신만큼이나 피폐해진 주인공 현수에게 동질감을 느꼈다는 김혜수를 5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났다.
“정말 기묘하게도 절망감에 휩싸여 있을 때 이 작품을 만났어요. 살다 보면 내가 시작하지 않았고, 전혀 예측할 수도 없는 고통과 절망의 순간에 맞닥뜨릴 때가 있잖아요. 그런 상황에 처한 현수의 감정이 저와 닮았다고 느꼈어요.”
영화는 이혼소송과 신체마비 등으로 오래 쉬다가 복직을 앞둔 경찰대 출신 경위 현수가 범죄사건의 핵심 증인이다가 실종된 소녀 세진(노정의)의 자취를 추적하는 과정을 그렸다.
수면제를 먹어야 겨우 잠드는 현수의 모습이 실제 자신과 겹쳐보였다는 김혜수는 영화 대사 일부를 직접 쓰기도 했단다. 전날 촬영을 마친 듯 대사를 술술 읊었다.
“‘난 매일 꿈을 꿔. 꿈에서 난 죽었더라고. 죽어있는 나를 보면서 그 생각을 해. 저걸 누가 좀 치워라도 주지’라는 대사가 있어요. 제가 괴로웠을 때 반복해서 꿨던 꿈이에요. 대사에 넣을 계획은 없었는데 촬영을 거듭하면서 ‘현수도 그때 내 마음 같았겠구나’ 하는 마음에 추가했어요.”
운 좋게도 곁을 지켜준 친구들이 있었다는 김혜수는 이 영화가 삶의 벼랑 끝에 놓인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길 바란다.
“고통은 극복하기보다 그 순간을 버텨내는 거예요. 그 과정에서 말없이 건네는 손길 하나가 큰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다는 걸 아셨으면 좋겠어요. 현수가 세진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진 못해요. 다만 자신과 닮은 상처를 가진 사람을 보듬음으로써 현실과 직면하고 그 다음을 생각할 용기를 내는 거죠.”
영화 ‘내가 죽던 날’ 스틸컷.스크린 속 현수는 충혈 된 눈, 대충 발라 삐져나온 립스틱으로 표현된다. ‘타짜’의 정 마담, ‘도둑들’의 팹시, ‘관상’의 연홍 등 요염한 얼굴로 카메라 앞에 서던 그의 대표작 속 캐릭터와는 상반된다.
“작은 영화지만 제가 힘을 실어주겠다는 생각으로 작품에 출연한 적은 한 번도 없고, 할 생각도 없어요. 이런 이야기가 제대로 만들어져 소개될 필요가 있겠다 싶으면 선택하죠. 영화 제목대로 ‘내 마음이 완전히 죽던 날’이지만 다시 살아갈 날이 남아있다는 희망을 관객이 느끼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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