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 덕후’ 이지수 번역가
원서 번역본 개정판 가리지 않고 수집…하루키 감성에 반해 일문학과 진학도
“‘국경의 남쪽…’ 알면 진정한 덕후로 인정할게요 ㅎㅎ”
《‘아무튼, 하루키’ 저자이자 번역가 이지수 씨(37)는 “무라카미 하루키 덕후에 명함도 못 내밀 것 같다”고 걱정부터 했다. 그는 “하루키 덕후라 하면 왠지 아침부터 파스타를 먹으며 야나체크 심포니에타를 들어야 할 것만 같은데 그렇지 못하다”고 했다. 하루키가 노벨 문학상을 받도록 신사에서 기도(?)하며 밤새운 적도 없고 LP판 같은 일명 ‘하루키 굿즈’를 모으지도 않는단다.》
하지만 그는 사춘기 시절부터 하루키의 명문장과 담백하고 쿨한 감성에 반해 일문과 진학을 결심한 자타 공인 ‘하루키 새싹’이었다. 원서로 하루키를 읽고 싶어 일문학을 공부했고 지금은 사노 요코, 고레에다 히로카즈 등의 글을 옮기는 번역가로 산다. 서재에 꽂힌 하루키 책만 80여 권. 원서 번역본 개정판을 모두 수집한다. 그의 ‘아무튼, 하루키’는 4쇄까지 찍으며 꾸준히 인기를 얻고 있다.
글을 쓰다 막히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속 “완벽한 문장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완벽한 절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을 곱씹고 술 먹다 화장실 가선 “맥주의 좋은 점은 말이야, 전부 오줌으로 변해서 나와 버린다는 거지. 원 아웃 1루 더블 플레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야”를 읊조렸다는 그. 염려와 달리 하루키 덕후의 가장 큰 미덕을 갖춘 그에게 이 계절 즐기기 좋은 하루키 책(문장)을 추천받았다.
―‘꼭 읽어야 할 하루키 책’ 세 권은….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스토리만 보면 불륜을 다룬 ‘막장’ 같지만 멈출 수 없는 흡인력이 있다. ‘상실의 시대’ 와타나베의 성숙한 남자 버전을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초기작 특유의 멜랑콜리한 분위기가 백미다. 일본 옴진리교 테러를 다룬 르포르타주 ‘언더그라운드’ ‘약속된 장소에서’도 추천작. 선악의 단순한 도식 대신 사건의 근본 원인이 된 사회 구조를 파헤쳤고 하루키를 좀 더 큰 작가로 성장시켰다. 패션 브랜드와 만년필 광고용으로 잡지에 게재한 짧은 글인 ‘밤의 원숭이’도 ‘이게 뭐지?’ 싶은 경쾌하고 재밌는 글이 가득하다.”
―‘이 책 알면 덕후로 인정한다’는 작품은?
"아까 말한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살면서 이 책을 아는 사람을 딱 두 명밖에 못 만났다."(이때 공교롭게도 사진기자가 이 책을 소장했다고 ‘덕밍아웃’을 해서 아는 사람이 ‘세 명’으로 늘었다.)
―‘하루키의 이 책 이 구절’ 하는 게 있나.
“‘어느 날 아침 눈을 뜨고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어디선가 멀리서 북소리가 들려왔다. … 나는 왠지 긴 여행을 떠나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먼 북소리’) 해외여행이 불가능해진 이 시기, 유럽 체류 시절 하루키 글로 여행 기분을 낼 수 있다. ‘우리는 그때 뭔가를 강하게 믿었고, 뭔가를 강하게 믿을 수 있는 자기 자신을 가졌어. 그런 마음이 그냥 어딘가로 허망하게 사라져 버리지는 않아.’(‘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어린 시절 가진 믿음의 힘을 말하는 이 문장 역시 혼란스러운 요즘 곱씹어볼 만하다.”
―하루키표 힐링을 원하는 이들에게 추천할 만한 게 있다면….
“롤 캐비지. ‘이윽고 슬픈 외국어’ 225쪽에 나오는 요리인데 양배추에 고기 다진 것과 볶은 양파를 넣고 찐다. 하루키가 바를 운영할 때 항상 대량으로 만들었는데 그때 숙련돼 지금도 양파 썰 때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고 한다. 맥주와 곁들이며 찰스 톰프슨과 콜먼 호킨스의 ‘It‘s the Talk of the Town’을 함께 듣는다면 좋겠다. 하루키가 재즈카페에서 아르바이트 하던 시절 자주 듣던 매우 근사한 피아노 색소폰 연주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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