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벽두부터 한반도 안팎에서 내로라하는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상하이로 모여 들었습니다.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죠. 1월 3일 시작한 국민대표회의는 자격심사부터 진행했습니다. 대표로 인정할지를 판가름하는 절차였죠. 임시정부 국무총리 대리를 지냈고 이 회의 임시의장으로 뽑혔던 안창호도 한때 사임할 만큼 까다로운 심사였습니다. 지역·단체대표 125명이 심사를 통과해 3월부터 독립운동사상 최대 규모 회의가 본격 개막했습니다.
국민대표회의는 제헌의회와 같았죠. 헌법을 제정하는 국회라는 말입니다. 잠깐, 국회인 임시의정원과 행정부인 임시정부가 멀쩡하게 있는데 무슨 소리냐고요? 맞습니다.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있는데도 코앞에서 이 회의가 열렸죠. 의회가 2개 존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비정상적이고 기형적인 상황은 임시정부의 분열과 무능이 불러왔죠. 거족적인 3·1운동 덕분에 탄생한 임시정부는 1920년 말에 이르자 한계에 맞닥뜨렸습니다.
기호파와 서북파가 으르렁거리고 임시대통령 이승만과 국무총리 이동휘가 사사건건 맞선 데다 보다 못한 소장파가 우리가 나서겠다고 들이받는 지경이었습니다. 이승만과 이동휘의 갈등 뒤에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념 다툼 그리고 외교독립론과 무장투쟁론의 노선 대립이 깔려 있었죠. 그나마 독립운동을 잘 이끌었으면 넘어갔겠지만 그토록 기대를 걸었던 외교독립론은 워싱턴군축회의에서 무참한 실패를 맛봤죠. 임시정부가 설치한 교통국과 연통제는 이맘때 일제의 탄압으로 무너져 재정지원도 끊겼습니다.
박은식 등 14명은 일찌감치 ‘아(我) 동포에게 고함’을 발표해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요구했습니다. 1921년 2월이었죠. 하지만 당장은 워싱턴군축회의에 집중할 때라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큰 회의를 치를만한 돈도 없어서 시간만 차일피일 흘렀죠. 미국으로 떠난 이승만을 대리한 신규식 내각이 무너져 임시정부는 간판만 내건 상태였습니다. 마침 ‘레닌자금’이 도착해 가까스로 회의를 열 수 있었죠.
국민대표회의를 놓고 3개 진영이 형성됐습니다. 임시정부를 그대로 두자는 ‘고수파’와 이대로는 안 되니 고쳐서 쓰자는 ‘개조파’, 헐고 완전히 새로 짓자는 ‘창조파’였죠. 고수파는 하와이의 이승만으로부터 원격 지휘를 받는 기호세력 위주였고 개조파는 안창호 김동삼 여운형 윤자영 김철수 등이 중심이었습니다. 민족주의자와 일부 사회주의자들이었죠. 창조파는 박용만 신채호 김만겸 문창범 등 사회주의자와 일부 민족주의자들이 주축이었습니다.
6개 분과위원회를 두고 독립운동의 방향과 정책을 논의할 때까지는 그래도 순조로웠죠. 하지만 ‘시국문제’인 임시정부를 놓고는 ‘고쳐 쓰자’와 ‘새로 짓자’의 거리가 줄지 않았습니다. 개조파는 이승만을 탄핵하고 헌법개정, 정부조직 변경 등 권한을 국민대표회의에 주자며 고수파를 설득했으나 벽을 넘진 못했고 창조파도 주장을 굽히지 않았죠. 급기야 5월이 되자 의장 김동삼 일행이 통일은 틀렸다며 돌아갔고 곧이어 개조파 57명도 집단 탈퇴했습니다.
그러나 창조파는 6월 7일 자기들끼리 헌법을 제정하고 국무위원을 뽑았습니다. 국호도 정했고요. 동아일보 6월 25일자 3면은 이 소식을 전했죠. 기사 뒤에는 창조파의 독단을 성토하는 개조파 인사들의 이름이 길게 붙어 있습니다. 5개월이나 회의를 거듭했으나 난맥상만 드러낸 꼴이었죠. 이후 창조파는 새 정부를 세운다며 블라디보스토크로 갔지만 믿었던 소련이 일본을 의식해 지원을 거부하자 모두 물거품이 됐죠. 동아일보는 취재가 힘들어 며칠씩 늦게 기사를 실었습니다. 3월 17일자는 2월 14, 15, 20, 21, 22일 5일치 소식을 한꺼번에 싣기도 했죠. 이런 기사로나마 기대를 안고 지켜보던 독자들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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