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약사 삼촌’을 봤던 엘라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물었다. 1944년 5월 대규모의 유대인 학살이 자행됐던 아우슈비츠는 세상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나치친위대 장교는 엄지손가락 하나로 사람들의 생사를 결정했다. 왼쪽은 죽음, 오른쪽은 강제노동과 실험실 대상이었다.
엘라가 말한 약사 삼촌은 2차 세계대전 중 아우슈비츠에서 복무했던 빅토르 카페시우스였다. 제약회사 직원인 그는 부모가 의사였던 엘라 가족과 수영장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낼 정도로 다정한 삼촌이었다. 세 딸을 둔 아버지로 약국도 개업한 평범한 인물이었다.
책은 카페시우스를 중심으로 아우슈비츠에서 벌어진 만행과 종전 뒤 전범재판의 문제점을 다뤘다. 그는 독가스를 지키는 수문장이자 생체실험의 조수였다. 심지어 살해당한 유대인들의 시체 더미에서 뽑은 금니를 가방에 가득 싣고 도망친 장본인이었다.
저자는 남편이자 작가인 제럴드 포즈너와 함께 아우슈비츠에서 ‘죽음의 천사’로 악명 높았던 요제프 멩겔레를 비롯한 전범자들의 행적을 추적해왔다. 특히 카페시우스는 우리 이웃으로 쉽게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소시민을 자처했다는 점에서 놀랍다는 게 저자의 말이다.
책은 뜻밖의 장소에서 카페시우스와 조우했던 이들의 증언과 방대한 재판 기록, 나치 정권과 공생관계였던 기업들의 추악한 거래를 담아냈다. 전범재판 기간 내내 카페시우스는 범행을 부인하면서 자신은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던 무고한 피해자이자 일개 하수인이었다고 주장했다. 재판에서 9년 형을 선고받은 그는 1968년 복역한 지 2년 만에 독일 연방대법원에서 사면을 받고 풀려났다. 출소 뒤 그가 가족과 클래식 연주회에 참석하기 위해 처음으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자 관중은 열렬한 기립박수를 보냈다고 한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이 책이 나와야 할 이유인지도 모른다. 흔히 화해와 용서를 이야기하지만 결코 끝나지 않아야 할 싸움도 있다. 부록으로 있는 카페시우스와 아우슈비츠 수용소, 전범재판 사진이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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