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숨 멎어서도 방아쇠는…’ 항일 시가전 호외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1월 21일 11시 40분


1923년 3월 15일



플래시백


속보 매체가 많은 요즘엔 발행할 일이 거의 없지만 신문사는 정상적으로 인쇄해 배달하기를 기다릴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일이 일어나면 호외를 냈습니다. 100년 신문 동아일보도 수많은 호외를 찍었는데, 1923년 초 발행한 두 번의 호외는 그야말로 히트작이었습니다. 두 호외의 주인공은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1923년 1월 12일 밤 김상옥이 던진 폭탄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종로경찰서. 위아래 사진 ‘X’표시가 된 유리창을 통해 날아든 폭탄은 행인 7명을 다치게 하는 데 그쳤지만 일제 경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1923년 1월 12일 밤 김상옥이 던진 폭탄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종로경찰서. 위아래 사진 ‘X’표시가 된 유리창을 통해 날아든 폭탄은 행인 7명을 다치게 하는 데 그쳤지만 일제 경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 해 1월 12일 밤 8시 10분 경성 한복판 종로경찰서에 ‘쾅!’ 소리를 내며 폭탄이 터졌습니다. 당시 경성에는 경기도 경찰부 산하에 종로, 동대문, 용산, 서대문 등 4개의 경찰서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종로서 고등계는 독립운동 탄압과 고문의 본거지로 악명이 높았죠. 경찰서 서쪽 모퉁이 길에서 날아든 폭탄이 폭발하면서 주변에 있던 행인 7명이 다쳤고, 경찰서 유리창은 산산조각 났습니다. 창 옆에 걸어둔 순사복들은 벌집이 됐지요.

지금으로 서울경찰청장쯤 되는 우마노 경기도 경찰부장은 “폭탄이야 뭐 세상에 흔한 것 아니냐”며 대수롭지 않은 척했지만 속은 까맣게 타들어갔습니다. 총독부 고관 및 친일파 귀족들을 총살하고 주요 관공서를 폭파하기 위해 폭탄과 육혈포를 가진 배일파(排日派)가 경성에 잠입했다는 소문이 돌던 와중에 일본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사이토 총독이 경성을 출발할 날짜가 며칠 앞으로 다가온 터에 경찰의 심장부가 뚫렸으니까요. 동아일보는 분초를 다퉈가며 그날 밤늦게 호외를 발행했습니다.
중국 상해 망명시절의 김상옥. 1920년 8월 미국의원단의 경성 방문을 계기로 사이토 총독을 처단하고 무력봉기를 하려는 계획이 탄로나 상해로 피신한 그는 이시영 조소앙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깝게 지냈으며, 김원봉의 의열단에 공감했다.
중국 상해 망명시절의 김상옥. 1920년 8월 미국의원단의 경성 방문을 계기로 사이토 총독을 처단하고 무력봉기를 하려는 계획이 탄로나 상해로 피신한 그는 이시영 조소앙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깝게 지냈으며, 김원봉의 의열단에 공감했다.

경찰은 1920년 8월 미국의원단의 경성 방문을 기해 무력 항일전을 벌이려다 사전에 발각되는 바람에 중국 상해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던 의열단원 김상옥을 종로서 폭탄투척의 범인으로 지목하고 1월 17일 그가 숨어 있던 삼판통(지금의 후암동) 김상옥의 매부 집으로 날랜 순사 14명을 보냅니다. 하지만 김상옥은 1명을 사살하고 2명에게 부상을 입힌 뒤 포위망을 뚫고 유유히 잠적합니다.
1923년 1월 22일 김상옥이 수백 명의 일제 경찰과 대치하며 3시간 넘게 총격전을 벌였던 경성 효제동 73번지 일대. 상황종료 후에도 경계하는 순사들이 보인다. 5일 전 급습한 경찰의 포위를 뚫고 이곳에 몸을 숨긴 김상옥은 최후를 맞은 뒤에도 방아쇠에 건 손가락을 펴지 않았다.
1923년 1월 22일 김상옥이 수백 명의 일제 경찰과 대치하며 3시간 넘게 총격전을 벌였던 경성 효제동 73번지 일대. 상황종료 후에도 경계하는 순사들이 보인다. 5일 전 급습한 경찰의 포위를 뚫고 이곳에 몸을 숨긴 김상옥은 최후를 맞은 뒤에도 방아쇠에 건 손가락을 펴지 않았다.

그로부터 5일 뒤인 1월 22일 김상옥은 최후의 일전을 치릅니다. 일경은 효제동 동지의 집에 은신한 김상옥을 찾아내고는 수백 명의 병력으로 에워쌌습니다. 김상옥은 숨어 있던 벽장의 흙벽을 손가락으로 파내 탈출한 뒤 이집 저집 옮겨 다니며 일기당천(一騎當千)으로 3시간 넘게 교전하죠. 경찰은 힘도, 총탄도 다 떨어진 김상옥에게 집요하게 항복을 권했지만 그는 상해를 떠나올 때 동지들에게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다”고 약속한 것처럼 피투성이가 돼 순국합니다.
1923년 1월 26일 김상옥의 상여가 이문동 공동묘지로 향하고 있다. 삼엄한 감시를 피해 몰래 집에 들를 때도 밥 한 술 뜨기는커녕 앉지도 못했던 김상옥은 순국한 뒤에야 노모와 부인 등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1923년 1월 26일 김상옥의 상여가 이문동 공동묘지로 향하고 있다. 삼엄한 감시를 피해 몰래 집에 들를 때도 밥 한 술 뜨기는커녕 앉지도 못했던 김상옥은 순국한 뒤에야 노모와 부인 등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총독부는 이 일이 알려지면 민심이 크게 동요할까봐 엄격히 보도를 통제하고, 발생 거의 두 달 뒤인 3월 15일에야 게재금지를 해제했습니다. 동아일보는 ‘조선 천지를 진동케 한’ 거사를 알리는 데 다음날까지 기다릴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당일 발행한 양면 호외 1면 중 ‘김상옥의 최후 1막’은 ‘숨이 멎은 뒤에도 육혈포에 건 손가락을 펴지 않고 (방아쇠) 당기는 시늉을 했다’고 김상옥의 장렬한 최후를 묘사했습니다. 2면은 김상옥의 일생과 그의 모친 인터뷰로 채웠는데, 김상옥은 거사를 앞두고 어머니와 짧게 만난 자리에서 “이번에는 나 마지막 보는 줄 아시오. 아주 단판씨름을 하러 왔소”라며 굳은 결심을 털어놓았다고 합니다.
순국 75년 만인 1998년 5월 동아일보사 후원으로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건립된 김상옥의 동상. 석조 받침대엔 ‘…비굴한 삶을 잇느니 장렬한 의거로 죽음을 택한 대한인 김상옥…’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순국 75년 만인 1998년 5월 동아일보사 후원으로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건립된 김상옥의 동상. 석조 받침대엔 ‘…비굴한 삶을 잇느니 장렬한 의거로 죽음을 택한 대한인 김상옥…’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동아일보와 김상옥과의 인연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듬해인 1924년 한식 즈음인 4월 8일자에 아들의 묘 앞에서 통곡하는 노모의 아픔을 그렸고, 1927년 4월 20일자에는 김상옥 사후 쇠락해 채권자에게 집마저 뺏긴 그의 가족을 동정하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1930년 김상옥의 아들 태용 씨를 특채한 데 이어 순국 75년을 맞은 1998년엔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김상옥 동상 건립을 후원하기도 했습니다.

대한민국정부는 김상옥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습니다.

정경준 기자 news91@donga.com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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