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속은 일본 상품 불매…겉은 우리 상품 쓰기 한마음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1월 24일 1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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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2월 16일



플래시백
1923년 2월 16일은 설날이었습니다. 28년 전 을미개혁으로 양력을 채택하면서 설은 이전 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최대의 명절이었죠. 이날 경성에서는 남녀 수천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행진이 벌어질 참이었습니다. 참석자들은 한결같이 무명으로 만든 두루마기와 치마를 입고 ‘내 살림 내 것으로’ ‘조선사람 조선 것’ 표어가 찍힌 전단을 나눠주려고 했죠. 그러나 종로경찰서가 2일 전 ‘금지’ 통보를 하는 바람에 행진은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물산장려운동은 일제가 강제 중단시킬 정도로 큰 잠재력을 지닌 실력양성운동이었죠. 원래 1920년 8월 평양에서 처음 시작됐지만 전국으로 확산된 때는 1923년이었습니다. 조선청년회연합회가 전해 12월 표어 현상공모 광고를 5차례 싣고 수상작을 발표하면서 여론에 불을 붙였습니다. 동아일보는 이듬해 1월 5일부터 연속 4일간 사설을 실으면서 불길 확산에 힘을 보탰죠. 이달 25일 조선물산장려회 창립총회가 열려 구심점이 생겼고요.

곧 경제자립과 소비절약 움직임이 들불처럼 번져나갔습니다. 물산장려회 자조회 자작회 토산장려회 같은 단체가 여기저기 생기고 금주 금연 바람이 불었죠. 유치원 꼬맹이들이 ‘토산장려’ 깃발을 들고 “우리는 우리 것을 먹고 입고 삽시다”라고 외쳤습니다. 기생들도 우리 옷감으로 옷을 해 입자고 결의했죠. 따르지 않으면 권번에서 제명하겠다고 했고요. 옷맵시가 영업수단인 기생들이 무명 치마를 입겠다는 것은 손실도 감수하겠다는 의지였을 겁니다. ‘경제의 3·1운동’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죠.


강력한 물산장려운동 배경에는 토착기업 위기의식이 있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 일본이 불황에 빠졌고 1920년 회사령 폐지로 일본 기업들이 한반도로 건너왔죠. 1923년 4월 일제가 관세를 모두 없앤다는 소문이 돌자 토착기업가들은 기댈 곳이 없었습니다. 유일한 토산품이라고 할 옷감도 일제 자본에는 바람 앞의 등불이었죠. 돌파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입어라! 조선사람이 짠 것을. 먹어라! 조선사람이 만든 것을. 쓰라! 조선사람이 지은 것을’이었습니다. 슬며시 일본상품을 불매하고 우리 것을 쓰면 우리 기업이 성장할테니까요.

하지만 기세 좋던 물산장려운동은 1년 만에 꺾이기 시작했습니다. 나라도 정부도 없는 상태에서 자급자족 경제로 살 길을 찾으려는 방식은 일본 거대 자본에 역부족이었죠. 토착 방직업체도 일본산 실이 없으면 옷감을 짤 수 없었습니다. 손해 볼 것 없는 일제는 틈틈이 탄압하면서 지켜보았죠. 각지 물산장려 단체가 제각각 움직였던 것도 걸림돌이 됐습니다. 배를 불린 것은 일부 상인들뿐이었죠. 공급량이 적은 토산품 가격이 크게 뛰었기 때문입니다.


프롤레타리아 즉 무산자는 물산장려운동에 반대해야 한다는 사회주의자들의 공세는 내부의 장벽이었습니다. 물산장려운동이 잘 되면 일제 자본가 대신 토착 자본가들이 지배자가 된다는 논리였죠. 1923년 3월 말 열린 조선청년당대회에서는 ‘물산장려운동 타도’를 결의하기까지 했습니다. 보다 못한 연희전문 교수이자 마르크스주의자인 이순탁은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하려면 경제를 발전시켜 생산력을 먼저 높여야 하지 않느냐고 반박했습니다. 이 시기 동아일보는 물산장려를 둘러싼 이론투쟁에 지면을 아낌없이 내주었죠.


동아일보 1923년 2월 16일자 3면은 무산된 정월 초하루 물산장려운동 행사를 지면에서나마 상세하게 소개했습니다. 조선물산장려회 깃발과 휘장도 안내하고 선전지 문안도 그대로 옮겨 실었죠. 신문관과 한성도서주식회사가 6만 장에 이르는 선전지를 무료로 인쇄해 줬다는 기특한 소식도 담았습니다. 부산 군산 성천 등 지방의 물산장려 움직임도 생생하게 전했죠. 각지의 이런 정성 덕분에 물산장려운동은 1940년까지 명맥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진 기자 leej@donga.com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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