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울산의 주상복합아파트에서 대규모 화재 사고가 발생했다. 당시 진화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고 안타까운 피해가 발생했지만, 소방관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사망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33층이나 되는 초고층이다 보니 실신한 주민을 둘러업고 계단으로 내려오기조차 쉽지 않았지만, 소방관들의 노고 덕분에 주민은 무사히 이송됐고 회복 과정에 있다는 소식도 접할 수 있었다. 그러자 많은 사람은 소방관들의 노력과 희생에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고 더불어 그들의 처우개선에 대한 목소리를 다시금 높였다.
이뿐만이 아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늘어난 배송물량을 감당하지 못하고 올해만 15명의 택배기사가 과로사로 유명을 달리하자 많은 국민들은 안타까워했고 국토교통부는 부랴부랴 ‘택배기사 과로사 방지대책’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처럼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는 일이야말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큰 무기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길어지고 있는 코로나19와의 전쟁으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 또한 계속되다 보니 내 건강과 안위에만 집중하는 것도 버거운 상황이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공감은 큰 힘을 발휘한다. 하버드대학교 의대 임상심리학 교수인 아서 P. 시아라미콜리 박사는 최근 그의 저서 ‘당신은 너무 늦게 깨닫지 않기를’에서 “공감은 우리에게 필요한 통찰과 정보를 주고, 타인의 필요를 이해하며 그들의 슬픔과 기쁨을 나누어 관계에 깊이를 더하게 한다”고 말했다.
공감이 없다면 우리에게는 서로를 이해할 방도가 전혀 없을 뿐 아니라 타인에게 지지, 응원, 친절, 애정을 기대할 수도 없다. 또한 타인의 생각과 감정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그들의 의도를 읽어내는 것도 불가능하다.
사실 아서 P. 시아라미콜리 박사는 동생 데이비드의 자살을 막지 못한 데 대한 극심한 자책감에 시달려왔다. 마약과 범죄 등으로 수배되어 암스테르담으로 도망친 동생이 건넨 “사랑해 형”이라는 마지막 말에 “나도 널 사랑해”라는 대답 대신 “내일 전화할 테니 계획을 잘 세워보자”며 무심히 전화를 끊었다. 그 전화 후 동생은 차디찬 시신으로 발견됐다.
그는 ‘동생이 절망했을 때 나는 왜 죽음의 징후를 알아채지 못했을까?’, ‘내가 어떤 말을 해줘야 위로가 됐을까?’며 스스로 자책했고 이러한 고뇌는 지난 25년간 절망과 고통을 이해하고, 아픈 영혼을 위로하는 공감에 대한 연구로 이어졌다.
아서 P. 시아라미콜리 박사는 수백 명의 환자들을 상담해온 결과, 공감 능력은 배워 익힐 수 있는 기술이며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길러지고 발전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쳤다. 하지만 단순히 공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가 변화하고 성장하며 자기 본연의 모습을 되찾으려면 관계 안에서 공감을 표현하는 방법을 배워야만 한다.
그는 공감이 동정이나 연민, 설교, 충고 등과는 확연히 다르다고 역설했다. 공감은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마음을 느끼는 것이며 연민하는 것이 아니라 정서적 반응을 확인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또한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 관심을 갖고 귀담아듣는 것이며 충고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물론 이러한 공감의 힘을 악용하는 사례도 있다. 경품행사를 미끼로 노인들에게 값비싼 건강보조식품을 팔거나, 필요하지도 않은 보장 내역이 포함된 보험에 가입하도록 하는 등 공감의 힘을 ‘팔아먹는’ 행위가 그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피하려면 공감에 대해 더 잘 알아야 한다. 공감에 대해 깊이 알수록 위험을 감지할 수 있고, 우리를 속이고 이용하고 해치려는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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