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평화? 그건 일본이 한국을 강제로 합병함으로써 한 귀퉁이가 깨지고 말았습니다. 합병은 일본의 먼 장래를 위해서도 큰 실책입니다. …”
1915년 열린 전일본 대학생 웅변대회에서 와세대 대학 대표로 나온 조선인 고학생이 사자후를 토했습니다. 총리대신 오쿠마 시게노부, 웅변가 나가이 류타로 등 심사위원들은 순간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연사의 거침없는 논리에 점점 빠져들었습니다. 그리고 주저 없이 이 21세 청년을 1위로 선정했죠. 오쿠마는 “그가 조선 학생이라니…”라며 애석해 했다고 합니다.
이듬해 와세다대 정치경제학과를 차석 졸업하고 귀국한 이 청년은 조선총독부 관리 제의를 거절하고 홀어머니를 모십니다. 하지만 곧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상하이에서 몽양 여운형 등과 신한청년단을 결성해 활동하죠. 1919년 국내에 잠입했다가 3·1운동 직전 체포됐지만, 일본 요인들의 초빙으로 도쿄를 방문하게 된 몽양이 통역으로 그를 고집한 덕에 다시 세상에 나와 민족지 창간에 몰두합니다.
네, 동아일보 창간사를 쓴 설산 장덕수 얘깁니다. 동아일보 초대 주간, 창간 이듬해인 1921년 부사장 겸 주필이 된 그는 1차 무기정간의 빌미가 된 ‘제사문제를 재론하노라’ 등 일제의 심장부를 겨눈 사설들을 집필하고 도쿄유학생 순회강연, 재외동포 위문회, 민립대학 설립 등의 사업을 벌였습니다. 대외적으로도 조선노동공제회를 조직하고 조선체육회 창립을 주도하는가 하면 청년운동에 헌신해 조선청년회연합회, 서울청년회 조직에 앞장섰습니다. 탁월한 식견과 열정, 달변으로 자연스럽게 당대의 지도자로 명성을 높여갔죠.
그러자 일제 말고도 내부의 적이 생겨났습니다. 함께 청년운동을 하던 일부 사회주의 세력이 ‘반장(反張·반 장덕수) 운동’에 나선 겁니다. 한참 뒤 누명을 벗었지만 소련의 레닌이 준 거액을 착복했다는 모함까지 받았습니다. 요즘 말로 ‘멘붕’이 왔을 법한 그에게 동아일보는 미국특파원 발령을 냅니다. 해외통신원 대신 본사 기자들을 상주특파원으로 내보내면서 미국엔 부사장급 인사를 파견하기로 한 거죠. ‘자유의 땅’ 미국에서 공부도 더 하라고 권합니다.
동아일보는 1923년 4월 19일자 1면 ‘본보 장덕수 주필을 보내며’에서 ‘창간 이후 3년간 올바른 논지를 펴고 큰 붓을 휘두른 그의 활약이 긴요한데 장대한 뜻을 결행하니 연모의 마음이 절실하다’며 그의 부재를 아쉬워합니다. 장덕수는 이날 경성을 출발해 부산, 도쿄를 거쳐 요코하마에서 출발하는 배에 올랐습니다. 미국 땅을 밟은 것이 5월 16일이었으니 거의 한 달이 걸린 긴 여정이었습니다.
기사는 그러나 ‘그가 조선에 있으나, 조선 밖을 향하나 뜻한 바는 같을 것이며, 노력도 한결같을 것’이라며 깊은 신뢰를 나타내죠. 과연 장덕수의 ‘민족애’는 조금도 덜하지 않았습니다. ‘경성으로 치면 종각에서부터 동으로는 동대문, 서로는 서대문까지 이어질 만큼 흔한 자동차의 행렬’을 봐도 과학문명에 눈 감고 살았던 우리 민족, 끝 모르는 넓은 땅덩이를 봐도 한 몸 붙일 곳 없는 우리 민족, 원적 주소 나이 이름 행선지 등등을 적는 숙박계가 없는 여관에 들 때에도 우리 민족을 떠올렸습니다. 그는 이런 감회를 1923년 12월 1일자부터 ‘미국 와서’라는 제목으로 43회 연재했습니다. 오리건 주립대에서 공부할 때 ‘미국의 대학’, 뉴욕의 컬럼비아대로 옮겨서는 ‘뉴욕 통신’이라는 고정란을 맡기도 했고요.
당초 2년 예정으로 떠난 장덕수는 박사학위까지 취득하느라 13년여 만인 1936년 12월에야 귀국합니다. 하지만 동아일보는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무기정간 상태여서 고려대 전신인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하죠. 광복 후에는 정치인으로 변신했는데, 이 후반기 삶은 다시 소개할 기회가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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