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고아 소녀가 세계 최고의 체스 선수가 되는 이야기를 다룬 넷플릭스 드라마 ‘퀸스 갬빗’이 화제다. 지난달 23일 공개된 지 4주 만에 6200만 계정이 시청하면서 역대 넷플릭스 ‘미니 시리즈’ 사상 최고 시청자 수를 기록했다. ‘오늘의 한국 TOP10 콘텐츠’ 2위에도 오르며 체스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 시청자들까지 사로잡고 있다.
장기나 바둑도 아닌 체스에 한국 사람들마저 빠져든 이유는 뭘까. 그 이유를 작품을 기획하고 제작한 윌리엄 호버그 총괄 프로듀서에게 들어봤다.
●‘체스 팬’만 즐기는 작품 넘어서
윌리엄 호버그 총괄 프로듀서는 동아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체스에 대한 작품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 핵심”이라고 했다. 체스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지만 한 인간이 역경을 극복하는 보편적인 이야기를 다뤄 체스 문외한들에게도 사랑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는 “남자들의 세계에 놓이게 된 고아 소녀에 대한 인간적인 이야기”라며 “천재가 치르는 대가에 대한 이야기가 관객을 끌어당기는 것”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가 체스를 다루는 방식은 꽤나 정교하다. 배우들이 체스에 거의 문외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빠른 속도로 체스를 두는 ‘스피드 체스’ 장면까지 완벽히 재현했다. 이는 대부분의 체스 장면이 전설적인 러시아 체스 선수 가리 카스파로프와 미국의 유명 체스 코치 브루스 판돌피니의 조언 하에 설계됐기 때문이다. 그는 “(두 사람은) 토너먼트의 모든 사소한 디테일까지 진짜처럼 만들고자하는 다양한 제작진의 백만 가지 질문들에 답변해 줬다”고 했다.
체스에 대한 정교함은 작품에 대한 몰입도를 높였다. 이 작품의 제목인 퀸스 갬빗은 체스 말인 ‘폰’을 내어 주는 대신에 전개 속도를 높이는 체스 시작 방법으로 드라마 속에서 주인공의 승부사적인 면모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는 “체스를 전혀 모르는 관객에게도 그런 존중이 전해지는 것 같다”고 했다.
이 작품은 체스 세계에 여자가 사실상 전무하던 1950, 60년대를 다룬만큼 일각에선 ‘여성 서사’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지금 남성들의 세계에서 승리를 거머쥐는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의 가치에 대한 이야기는 다소 뻔하게 느껴질 수 있다”며 “그러나 탁월하게도 퀸스 갬빗은 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위대함으로 나아가는 한 인물의 여정을 그리고 있으며 그 여정의 주인공이 여성일 뿐이다”라는 LA 타임스의 리뷰를 인용해 답을 대신 했다.
●작품 빛낸 주인공 ‘안야 테일러 조이’
주인공 베스 하먼 역할을 맡은 안야 테일러 조이에 대한 찬사도 쏟아지고 있다. 영화 ‘23 아이덴티티’ 등 주로 공포 영화에서 활약하던 배우를 캐스팅한 이유를 묻자 그는 “흥미로운 얼굴을 지닌 배우가 필요했다. 놀라운 눈을 가지고 있으며 그 자체로 워낙 똑똑한 사람”이라고 했다. 드라마 속에서 단순히 미인보다는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천재’ 역할을 맡아야 했기 때문에 복잡미묘한 감정이 배우의 눈을 통해 드러나야 했다는 것이다.
그는 “그녀가 생각에 잠긴 것을 보기만 하는 조용한 순간에도 많은 이야기를 해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고도 했다. 그의 말대로 베스 하먼이 체스 판 앞에서 깍지 낀 손등 위에 턱을 올려놓고 정면을 응시하는 장면은 천재성과 아픔을 함께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드라마 속 감각적인 미장센 역시 화제다. 1950, 60년대를 배경으로 한 만큼 모델 출신인 안야 테일로 조이가 짧은 곱슬 단발에 허리가 잘록한 치마를 입고 나와 당시 유행했던 디올의 ‘뉴 룩’을 보여준다. 독일 베를린에서 주로 촬영해 전후 분위기를 짙게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디자인과 의상과 카메라는 모두 하나고, 모든 것이 스토리와 캐릭터에 의해 결정된다”며 “작품의 배경 시기 또한 멋진 팔레트”라고 했다.
●시즌2 기대엔 “알맞게 끝났다”
이 작품은 기획 단계부터 30여년이 걸린 것으로 유명하다. 소설가 월터 테비스가 1983년 발표한 동명의 원작 소설을 읽고 빠진 영화 제작자 앨런 스콧은 1992년 판권을 구입했다. 영화 ‘다크나이트’의 조커 역을 맡은 히스 레저가 관심을 보여 감독을 맡을 예정이기도 했다. 히스 레저는 어린 시절 호주에서 체스 주니어 챔피언 자리에 오르기도 했을 만큼 체스 마니아다.
그러나 2008년 히스 레저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며 이 프로젝트는 엎어지고 말았다. 히스 레저의 작품이었다면 어땠을지 추측하는 시청자들의 시선을 대신 묻자 그는 “그(히스 레저)가 이 작품을 맡으려 했던 것도 소설의 우수성 때문이다. 이 작품을 어떻게 연출했을지 짐작하기 어렵다”고 말을 아꼈다.
이후에도 이 작품은 장편 영화 제작이 추진됐다 비용 조달에 어려움을 겪어 실패했다. 넷플릭스의 지원을 받은 뒤에야 당초 영화로 기획되던 작품은 드라마로 촬영됐다. 그는 “‘예스’를 받기까지 30년이 넘게 걸린 여정이었다”고 소회했다.
시즌 2에 대한 요구가 많지만 그는 “딱 알맞게 끝났다는 느낌이다. 그 자체로 완전한 것 같다”고 선을 그었다. 이미 원작 소설의 대부분을 다뤘고 원작자 월터 테비스가 1984년 사망한 만큼 새로운 이야기를 창작하는 건 부담이 크다는 것이다. 그는 “만찬 같은 작품이었다.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할 진정한 이유가 없다면 여기에 무엇인가 더한다는 것은 작품을 작위적으로 만들 위험이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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