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은 푸치니 오페라 ‘라보엠’의 계절. 4막 중 앞의 두 막이 크리스마스이브를 배경으로 하기에 매년 연말이면 세계 곳곳에서 라보엠이 공연됩니다. 국립오페라단도 1일 광주문화예술회관, 11·12일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23·24일 안동문화예술의전당 무대에 라보엠을 올립니다.
라보엠 1막을 들은 청중에게는 4막의 음악도 낯이 익습니다. 여주인공 미미가 아픈 몸으로 연인 로돌포의 하숙방에 돌아오고 친구들은 자리를 피해줍니다. 이때 관현악에 1막의 선율이 차례로 흘러갑니다. 1막에서 하숙생들이 떠들썩하게 장난치던 장면의 음악이 나지막하게 나온 뒤 로돌포와 미미가 사랑에 빠지는 1막 2중창 주요 선율들이 처연하게 흐릅니다. 왜 1막 음악이 다시 등장할까요.
이 장면 직전에 친구들이 나가면서 방이 조용해집니다. 의식이 혼미했던 미미도 정신이 돌아오면서 주위가 눈에 들어옵니다. 떠나 있었지만 낯익은 곳. 연인의 친구들이 법석을 떨며 온갖 유쾌한 분위기를 자아내던 곳이 기억되고 느껴집니다. 연인과의 첫 만남도 떠올랐겠죠. 그렇게 한 여인의 가슴에 흘렀을 장면들을, 푸치니는 1막의 선율을 회상함으로써 애달프게 표현했을 것입니다.
푸치니에게 이렇게 첫 부분의 선율들을 끝막에 소환하는 일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첫 오페라 ‘빌리’부터 그렇습니다. 앞부분에서 여행의 평안을 기원하는 기도 선율이 후반부에서는 남주인공이 후회 속에 절규하는 선율로 쓰입니다. 작곡가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푸치니는 젊은 시절 독일 작곡가 바그너를 좋아했습니다. 바그너의 ‘유도동기(誘導動機·Leitmotiv)’ 기법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유도동기란 특정 인물이나 사건을 묘사하는 짧은 선율적 특징을 말합니다. 지크프리트라는 인물이 등장할 때 나왔던 선율이나 음악적 동기가 다시 나오면 ‘지크프리트가 또 나오겠구나’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푸치니도 여기서 영향을 받았지만 반드시 어떤 선율이 인물이나 사건에 일대일로 대응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단지 앞에 나온 선율을 다시 등장시키는 것만으로도 앞 장면에 나왔던 사건이나 분위기를 다시 불러내는 데 효과적이었습니다.
이는 푸치니가 사랑한 극의 줄거리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빌리, 라보엠, ‘나비부인’ 등 그의 대표작은 ‘푸치니 공식’이라 부를 만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①1막에서 주인공 남녀가 사랑에 빠진다. ②사랑에 위기가 닥치고 남자는 무책임하거나 무능력하다. ③긴 이별의 시간이 지난다. ④남녀는 (대부분 1막과 같은 장소에서) 다시 만나지만 여주인공은 병이나 배신의 상처로 삶을 마감한다.
푸치니는 이런 줄거리를 펼쳐낼 때 가슴 아픈 후반부에서 1막에 나왔던 행복한 장면들의 음악을 다시 불러내 그사이 흐른 시간과 아픈 현실을 실감시키며 눈물을 이끌어냅니다. 이 때문에 푸치니는 ‘단테의 충실한 후배’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에서 푸치니보다 여섯 세기 앞서 살았던 단테는 ‘신곡’ 지옥 편 등장인물 프란체스카의 입을 빌려 “괴로운 현재 속에서 행복했던 과거를 회상하는 것만큼 슬픈 것은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푸치니가 마지막 막에서 첫 막의 동기들을 회상하며 과거의 행복을 대조시키는 기법은 이 프란체스카의 독백을 상기시킵니다. 라보엠은 푸치니의 이런 공식이 효과적으로 발휘된 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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