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5월 1일은 아주 특별한 날이었습니다. 제1회 ‘어린이날’ 행사가 대대적으로 치러졌기 때문입니다. 이날 하루만이라도 괄시받던 어린이들이 한껏 웃게 해주자는 뜻있는 어른들의 정성이 결실을 본 날이었죠. 홍보를 위한 행진은 물론 축하식과 강연, 공연을 곳곳에서 열려고 했습니다. 행진은 일제가 허가하지 않는 바람에 무산됐지만 홍보지 12만 장 배포와 축하식, 강연, 공연은 계획대로 열렸죠. 지방에서도 행사가 진행됐습니다.
어린이날 행사는 ‘소년운동협회’가 주도했습니다. 이 협회에서 가장 주도적 역할을 한 단체는 천도교소년회였죠. 1921년 5월 1일 출범한 천도교소년회는 창설 1주년 때 벌써 어린이날 행사를 치렀던 선도자였습니다. 당시 유력한 종교였던 천도교를 배경으로 했고 천도교 정신이 스며들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죠. 천도교 정신이란 2세 교조(敎祖) 최시형의 가르침인 ‘어린이를 때리지 말라. 이것은 한울님을 치는 것이다’라는 한 마디로 압축될 수 있습니다.
어린이운동 지도자로는 소춘(小春) 김기전을 먼저 꼽아야 합니다. 부친이 천도교 도정(道正)이었고 어려서 천도교 교리강습소에서 공부한 뒤 천도교가 인수한 보성전문에서 학업을 이어갔죠. 천도교 월간지 ‘개벽’의 주필로 일하며 8차례 소년문제에 관한 글을 썼고 천도교소년회 총재로 동분서주했습니다. 특히 제1회 어린이날 ‘소년운동의 선언’을 선포했죠. ‘어린이를 인격적으로 대하라’, ‘만 14세 이하의 노동을 폐지하라’, ‘배우고 놀 수 있는 환경을 만들라’가 핵심입니다. 1924년 국제연맹 아동권리선언보다 빠른 세계 최초의 어린이헌장이었죠.
김기전은 어린이들에게 꼭 존댓말을 썼습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그의 개구쟁이 아들이 놀러나가려 하자 부인이 “오늘도 싸움을 하고 밥도 제때 들어와 먹지 않으면 종아리에서 피가 나도록 때릴 테다”라고 엄포를 놓았죠. 듣고 있던 김기전이 “한울님 같은 어린이에게 경어를 쓰라”고 하자 부인은 이내 “오늘도 나가서 싸움을 하거나 제때 밥을 먹지 않으면 다리몽둥이가 부러질 줄 아세요. 알겠어요?”라고 했답니다. 김기전은 어처구니없어 했죠.
소파(小派) 방정환의 공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방정환은 3세 교조 손병희의 셋째 사위가 되면서 천도교와 인연을 맺었고 역시 보성전문을 나왔죠. 소년운동협회가 구성됐을 때 일본 유학 중이던 그는 현지에서 색동회를 조직해 어린이날 기념식을 열었습니다. 방정환은 동화구연의 일인자였죠. 그의 동화구연을 감시하던 일제 순경까지 듣고 눈물을 흘렸을 정도였습니다. 그는 개벽사에서 낸 월간지 ‘어린이’ 편집을 도맡다시피 했죠. 이 잡지 덕분에 ‘어린이’라는 말이 우리들의 입과 귀에 익숙해졌습니다.
동요작곡가 정순철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2세 교조 최시형의 외손자인 정순철은 손병희가 거두어 주면서 방정환과 친분을 맺었죠. 두 사람은 비슷한 시기에 일본 유학을 했고 색동회도 만들면서 어린이운동에 전념하게 됩니다. ‘엄마 앞에서 짝짜꿍’과 ‘빛나는 졸업장을 받은…’으로 시작하는 ‘졸업식 노래’가 그의 대표작이죠. 이처럼 초기 어린이운동의 핵심 지도자들은 천도교와 떼려야 뗄 수 없었고 어린이운동을 독립운동의 하나로 보고 이끌었습니다.
동아일보도 힘을 보탰습니다. 제1회 어린이날 관련 소식을 1923년 5월 1일자 3면에 상세하게 실었고 △어른에게 드리는 글 △어린 동무들에게 △소년운동의 선언도 소개했죠. 어린이날과 메이데이(노동절) 주제를 묶어 쓴 이날 자 1면 사설은 삭제당했습니다. 발행 1000호가 되는 5월 25일자 3면은 독자들의 12, 13세 이하 자녀 1000명의 얼굴사진을 제공받아 한 면 전체를 채웠습니다. 이후에도 때마다 어린이 관련 기사를 비중 있게 실었죠. 어린이날이 5월 1일에서 5월 5일로 바뀐 사연은 주간동아 기사 ‘5월 5일이 어린이날 된 숨겨진 이유’(https://weekly.donga.com/List/3/all/11/1288737/1)를 참고하세요.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