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는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모리사키 가즈에 지음·박승주, 마쓰이 리에 옮김/296쪽·1만6000원·글항아리
일제강점기 대구의 한 시내버스 안. ‘아이고!’ 하며 올라탄 조선인 아주머니가 자리를 잡고 선다. 그는 자기 옆에 선 일본인 소녀를 보고는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그러고는 치마 속에서 잔돈을 꺼내 건네는데…. 일본인 엄마는 얼굴이 붉어지며 ‘괜찮다’고 거절한다. 식민 통치의 비극을 모른 채 조선 땅에서 나고 자란 소녀는 이름 모를 한국 어머니들의 따스함이 자신을 만들었다고 회고한다.
이 책을 쓴 이 일본인 소녀는 1927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교사인 아버지가 대구공립보통학교에서 일하게 돼 가족의 한국살이가 시작됐다. “조선의 마음, 풍물과 풍습, 자연이 나의 원형을 만들었다”는 그는 자신의 유년기 기억을 상세히 기록한다. 거창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지만 일제강점기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하나의 관점으로 흥미롭다.
그의 기록 속에서 조선인은 흰 옷을 입고 노래를 부르며, 결혼하는 새색시가 가마를 타고 오면 모두가 구경하고, 시장에서는 중국인 러시아인도 등장한다. 경주로 이사 간 뒤 왕릉과 유적을 돌아본 이야기도 생생하다. 담담하고 건조하게 기록된 이야기들 속에서 당시 사람들의 옷과 행동, 분위기를 자유롭게 상상해 볼 수 있다.
조선인과 직접적인 교류는 없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조선과 일본이 동등하다’는 국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조선의 땅을 소유하는 일본인들의 탐욕을 비판한다. 잘못된 것을 바꿀 용기는 없지만 인간을 향한 선량한 마음은 잃지 않았던 부모님 아래 자란 소녀는 패전 후 일본 규슈 지역 탄광촌에서 생활하며 작가가 됐다.
이 책이 한국어로 번역된 스토리도 흥미롭다. 2001년부터 대구 향토사를 직접 조사하고 복원하려는 시민운동 ‘대구읽기모임’을 통해 책은 한국인과 만나게 됐다. 대구읽기모임과 민간 한일 교류 거점 공간을 운영하는 박승주, 저자가 태어난 대구 삼덕동의 적산가옥을 조사하던 일본인 마쓰이 리에, 두 사람이 함께 번역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