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behalf of’가 ‘절반의’라는 KBS1 ‘특파원 보고’ [황규인의 잡학사전]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2월 13일 13시 59분


KBS1 화면 캡처
KBS1 화면 캡처
위에 있는 사진은 12일 KBS1에서 방영한 ‘특파원 보고 세계는 지금’ 화면을 캡처한 겁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 자막은 거의 완벽한 오역입니다.

KBS1에서 “미국 절반의 국민인 여러분”이라고 번역한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발언은 “on behalf of the American people”이었습니다.

학창 시절 ‘성문종합영어’를 열심히 공부하신 분이라면 ‘on behalf of’라는 영어 숙어는 ‘~을 대표(대신)하여’라는 뜻이라고 곧바로 떠올리실 겁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당시 발언. 홈페이지 캡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당시 발언. 홈페이지 캡처
이 다음 장면에서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미국 정부가 여러분에게 저지른 만행들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며 이 자리를 빌려 심심한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미국 국민을 대표해 사죄를 한 것인데 KBS1에서는 이를 “미국 절반의 국민인 여러분에게”라고 번역한 겁니다.

KBS1 화면 캡처
KBS1 화면 캡처
이 프로그램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가운데 24%만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예방 백신 접종에 긍정적인 인식을 지니고 있다고 소개했습니다. 그러면서 ‘터스키기 매독 생체실험’에서 그 이유를 찾았습니다.

미국 공중보건국은 1932년부터 1973년까지 앨라배마주 터스키기에 사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대상으로 비밀 생체실험을 진행했습니다. 매독으로 고통받고 있던 이들에게 ‘당신은 지금 악혈(bad blood)에 걸렸다. 치료해주겠다’고 속이고 뇌척수액을 뽑아 매독균에 대한 각종 검사를 실시했던 것. 1943년 매독 치료제인 페니실린이 세상에 나왔지만 미국 정부는 이들에게 아스피린과 철분제밖에 주지 않았습니다.

1972년 내부고발로 이 실험 존재가 알려진 뒤에도 실험에 참여했던 의사들은 “그 사람은 어차피 가난해서 치료도 못 받고 죽을 사람들이다. 차라리 의학 발전에 기여하고 죽는 게 낫지 않겠는가”라면서 잘못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미국 정부에서 이 실험에 대해 처음으로 공식 사과한 게 바로 클린턴 전 대통령이었습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피해자 및 유가족을 백악관으로 초청해 저 발언을 남겼습니다. 그러니까 “미국 절반의 국민” 같은 표현은 등장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다른 프로그램도 아니고 ‘특파원 보고 세계는 지금’에서 이런 번역을 남겼으니 그냥 지나치면 안 되는 일 아닌가요?

황규인기자 ki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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