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차별, 차별, 해도 세상에 이런 차별이 있을까요?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2월 15일 1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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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5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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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집은 꿈도 꿀 수 없었고 명주옷도 입을 수 없었습니다. 갓은 물론 가죽신도 허용되지 않았죠. 봉두난발에 대나무 패랭이 차림으로 다녀야 했으니 눈에 띄게 표가 났습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선 담배를 피우지도, 술을 마시지도 못했고 무조건 존댓말을 써야 했죠. 죽어서도 상여를 쓸 수 없었고 자녀를 교육시킬 수도 없었습니다. 결혼과 사회생활에도 금기가 많았습니다. 매질 같은 부당한 체형을 당해도 법은 멀리 있을 뿐이었죠.

이들은 바로 백정(白丁)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최하층 천민으로 지독한 차별을 받았죠.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도가 철폐됐습니다. 하지만 법적인 신분해방과 달리 뿌리 깊은 사회문화적 차별은 당장 고쳐질 리 없었죠. 일제는 호적에 ‘도한(屠漢)’이라고 써넣기까지 했습니다. 일제가 도살장을 관장하고 사용료를 거두면서 수탈은 더 강화됐죠. 한때 소가죽의 70%를 조선에서 수입했으니 수급에 차질이 없도록 단단히 틀어쥐었습니다.



경남 진주에서 꽤 돈을 모은 백정 출신 이학찬은 더 이상 참지 않았죠. 학교에서 백정이라고 아이들을 퇴짜 놓았기 때문입니다. 알고 지내던 강상호 신현수 등에게 울분을 털어놓았죠. 강상호는 부친이 정3품 통정대부였던 양반 자제였고 집안이 넉넉했습니다. 신현수는 진주청년회를 만든 선각자였죠. 일본인 도움으로 메이지대에서 공부하다 중퇴한 백정 출신 장지필도 가세했습니다. 이들이 뜻을 모아 1923년 4월 25일 ‘조선형평사’를 만들었죠.

40만 백정의 한을 대변하는 형평사는 ‘과거를 회상하면 온종일 통곡해도 피눈물을 멈출 수 없다’며 ‘계급을 타파하고 모욕적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권장해 우리도 참다운 인간이 되고 싶다’고 외쳤습니다. 계급타파를 앞세웠지만 기존 질서를 뒤엎는 것이 아니라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호소할 뿐이었죠. 장지필은 동아일보에 “우리의 운동은 애걸적이요, 반항적은 아닙니다”라고 밝혔습니다. 창립 1년 만에 지사 12곳, 분사 67곳을 거느리는 조직으로 성장했죠. 3·1운동 영향으로 각지 청년회나 노동공제회가 적극 후원한 덕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백정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밑바닥 차별의식은 여전했습니다. 농청(農廳)을 중심으로 농민들 반발이 거셌죠. 기생들조차 형평사 축하식에 불려가기를 거부했습니다. 이 해 5월 말에 진주 24개 농청 대표들이 ‘소고기 불매운동’을 결의하고 음식점마다 감시단을 보내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형평사에 동조한 상점에 수백 명이 몰려가 시위를 벌여 전쟁이나 다름없었죠. 몰매가 오가기도 했고요. 1925년 9월까지 모두 40건 넘는 충돌이 일어났죠. 일제 경찰은 일본 백정인 에타(穢多)도 평민처럼 대우하지 않는다며 잘못은 백정한테 있다고 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형평사 내부 분열까지 일어났습니다. 창립 1년 만인 1924년 장지필을 중심으로 백정만의 형평사혁신동맹을 만들었던 것이죠. 신분해방운동에 더 집중하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이에 ‘원조’ 형평사는 5월 29일자 동아일보에 장지필의 잘못을 조목조목 지적하는 공개서한을 실으며 맞섰습니다. 이후에도 분열과 갈등은 일제의 탄압과 사회주의사상 유입 등 변수가 겹치면서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차별철폐단체 수평사와 교류를 이어간 점도 일제가 탄압의 고삐를 당긴 요인이었죠.



동아일보는 5월 29일자 사설에서 ‘형평사운동은 조선인 모두의 해방운동에 큰 경종’이라며 ‘장래성과 창조성이 있는 해방운동은 소작인운동과 형평운동’이라고 지지했죠. 진주 농민들의 시위에는 5월 31일자 사설을 통해 ‘반대운동이 인격의 평등 관념을 무시하고 형평사원을 인간이 아니라고 간주했다면 시대의 진운을 무시하고 인격의 존중을 모독하는 어리석은 주장’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이후에도 형평사 소식을 꾸준히 전하며 평등의식 전파에 힘썼습니다.

이진 기자 leej@donga.com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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