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결코 당신을 떠나선 살 수 없고, 당신은 나와 살면 가정과 사회의 배척을 면할 수 없으니 사랑을 위해, 당신을 위해 차라리 한목숨 끊는 것이…”
“(죽어가는 연인을 안으며) 내가 누군지 알겠소?” “세상사람 중에 내가 가장 사랑하는 파건!”
셰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옴직한 대사 같지만 약 100년 전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비극의 주인공은 평양 기생 출신 강명화, 상대는 영남 대부호의 외아들이었습니다. ‘파건’은 그의 별호였지요.
가난 탓에 열한 살에 기생의 수양딸이 된 명화는 6년 뒤 경성으로 와 평양 기생조합인 경성권번에 적을 뒀는데 타고난 미모에 가무에도 능해 내로라하는 문인들의 애를 닳게 할 정도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그러다 1920년 여름 도쿄 유학생 파건을 만납니다. 그는 열렬한 애정공세를 퍼부은 끝에 명화의 마음을 얻어 학업도 포기한 채 부친 몰래 동거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화류계 스타와 백만장자 아들의 로맨스는 사람들의 입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고, 파건의 부친도 이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남자 집안에선 명화를 요부(妖婦)로 여겼고, 아들은 부랑자 취급했습니다. 지친 파건이 한때 명화를 의심하자 명화는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 사랑을 증명하기도 했죠. 결국 둘은 도쿄로 ‘사랑의 도피’를 하게 됩니다. 남자 쪽 도움을 받을 수 없어 명화가 살던 집을 팔아 근근이 생활비를 댔지만 둘에게는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시련은 곧 닥쳐왔습니다. 기생첩을 얻어 놀러 다니는 줄 알았던 도쿄 조선인 고학생들이 이들을 찾아와 “우리 유학생들의 치욕”이라며 행패를 부린 겁니다. 명화가 무고함을 호소하며 칼로 손가락까지 잘랐지만 유학생들의 오해는 풀리지 않았죠. 신변에 위협을 느낀 둘은 다시 경성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남자를 출세시켜 파건의 부친에게 며느리로 인정받겠다는 명화의 꿈은 점점 멀어져 갑니다. 1923년 6월 명화는 파건에게 “몸이 안 좋으니 온양온천에 가자”고 합니다. 평생 사달라고 하지 않던 새 옷도 청해 입었습니다. 그리고 명화는 남자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독약을 마시고 22년의 짧은 삶을 마감합니다.
이 소설 같은 사연이 6월 15, 16일자 동아일보에 보도되자 온 장안이 들썩였습니다. 강명화와 자신을 동일시해 그를 뒤따르는 ‘베르테르 효과’도 우려되는 형편이었죠. 그러자 동아일보는 7월 8일자 6면에 당대의 논객이자 신여성인 나혜석의 기고 ‘강명화의 자살에 대하여’를 실었습니다. 나혜석은 이 글을 통해 “동기가 어떻든 자기 생명을 끊는 것은 자포자기 행위이니 진심으로 세태를 분노한다면 적극적으로 세태를 개조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이어 “개인이나 사회나 역경을 만나 비로소 굳어지는 법”이라며 “자살을 추한 것, 열등한 것으로 여기고 죄악시하자”고 호소했죠. 하지만 정인을 잃고 인사불성이 된 파건은 “나는 죽을 수밖에 없다. 죽으면 합장해달라”고 입버릇처럼 되뇌다 그 해 10월 역시 음독자살하고 맙니다.
문화계는 좋은 소재를 만났습니다. 천민극단은 1923년 7월 ‘사실 비극 강명화’를 공연하려다 경찰의 제지를 받았습니다. ‘남의 일을 너무 노골적으로 밝히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는데, 파건의 부친이 돈으로 막았다는 뒷말이 많았다죠. 그러자 “거액을 내놓지 않으면 이 사건을 각색해 연극을 하겠다”고 협박한 극단도 있었다고 합니다. ‘강명화 창가’, ‘강명화 실기’, ‘강명화 전’ 같은 산문도 인기를 끌었습니다.
강명화의 슬픈 사랑은 1924년 일본인 하야카와 고슈의 무성영화 ‘비련의 곡’을 필두로 영화로도 제작됐습니다. 1967년에는 윤정희 신성일이 주연하고 이미자가 주제가를 부른 ‘강명화’가 개봉돼 10만 관객을 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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