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밝혀내야 할 또 하나의 진실, 간토 조선동포 학살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2월 26일 11시 40분


1923년 9월 3일


플래시백

1923년 9월 1일 발생한 대지진으로 일본 간토지방은 쑥대밭이 됐다. 왼쪽 사진은 도쿄 중심부의 랜드마크인 마루노우치 빌딩이 불타는 모습, 오른쪽은 여러 차례의 지진과 화재로 아비규환이 된 도쿄를 탈출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기차에 매달린 피난민들.
1923년 9월 1일 발생한 대지진으로 일본 간토지방은 쑥대밭이 됐다. 왼쪽 사진은 도쿄 중심부의 랜드마크인 마루노우치 빌딩이 불타는 모습, 오른쪽은 여러 차례의 지진과 화재로 아비규환이 된 도쿄를 탈출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기차에 매달린 피난민들.
“땅이 가로로 흔들리며 크게 진동하더니 곧 지반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대지진으로 변했다. 지진에 이은 화재로 시내는 불야성을 방불케 했다.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에 보니 집들은 간 곳 없고 돌기둥만 남았으며, 타죽은 시체가 도처에 쌓여 악취가 코를 찔렀다.”

구사일생으로 간토대지진의 참화를 피해 무사히 귀국한 도쿄 유학생 이주성(왼쪽)과 한승인. 이상협 특파원의 기사가 아직 도착하기 전인 9월 6일 동아일보는 이들이 전하는 현지 상황을 호외로 보도했는데, 조선인에 대한 자경단의 만행 등은 당국에 의해 삭제됐다.
구사일생으로 간토대지진의 참화를 피해 무사히 귀국한 도쿄 유학생 이주성(왼쪽)과 한승인. 이상협 특파원의 기사가 아직 도착하기 전인 9월 6일 동아일보는 이들이 전하는 현지 상황을 호외로 보도했는데, 조선인에 대한 자경단의 만행 등은 당국에 의해 삭제됐다.
아비규환의 현장을 간신히 빠져나온 도쿄 유학생 두 명의 증언입니다.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도쿄, 요코하마 등 일본 간토지방을 강타한 대지진은 행방불명을 포함한 사망자가 10만 명을 웃도는 최악의 참사였습니다. 재산피해도 당시 일본 일반회계 예산의 4배인 약 60억 엔에 달했다고 합니다.

간토대지진 급보를 접한 동아일보는 9월 2일자에 1보를 실은 뒤 그날 바로 1, 2차 호외를 발행했습니다. 이어 3일자에는 3면을 모두 털어 무려 34개의 관련기사를 실었죠. 대부분 피해 속보였지만 ‘염려되는 조선인의 소식’이란 기사에서 우리 유학생과 노동자들의 안부를 걱정하고 이들 가족의 애타는 심경에 동정을 표한 뒤 ‘본사 기자 특파’에서 동포의 안위를 조사하기 위해 특파원을 파견하니 가족의 안부를 알고자 하면 연락해달라고 당부했습니다.

간토대지진이 일어나자마자 현지에 급파된 동아일보 편집국장 이상협. 그는 요코하마와 도쿄를 무대로 취재는 물론 피해동포 구제, 조선인 학살 진상조사 등 1인 다역을 했다. 이상협은 1년여 전 니가타현 조선인 노동자 학살사건 때도 특파원으로 활약한 바 있다.
간토대지진이 일어나자마자 현지에 급파된 동아일보 편집국장 이상협. 그는 요코하마와 도쿄를 무대로 취재는 물론 피해동포 구제, 조선인 학살 진상조사 등 1인 다역을 했다. 이상협은 1년여 전 니가타현 조선인 노동자 학살사건 때도 특파원으로 활약한 바 있다.
동아일보 창간 때부터 계속 편집국장을 맡아온 하몽 이상협이 특파원 겸 해외동포위문회 파견원 자격으로 2일 밤 경성을 떠납니다. 빼앗긴 나라를 대신해 빵과 반찬 통조림, 음료 등 2만2000여 점의 먹을 것을 마련해 요코하마와 도쿄의 동포들을 위문한 그는 발로 뛰고 현지신문에 광고를 내 입수한 우리 동포들의 안부를 다섯 차례로 나눠 고국에 보냅니다. 1회분은 14일 발송했는데 우편 지체로 22일자에야 실을 수 있었습니다. 이에 자극받은 조선총독부도 부랴부랴 도쿄출장소를 통해 파악한 조선인 생존자 명단을 각 신문에 배포했죠.

그런데 당시 동아일보의 간토대지진 관련기사를 찬찬히 보면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뛰어난 취재력과 돌파력, 그리고 다작으로 정평이 난 이상협의 기사가 별로 없다는 겁니다. 기껏해야(?) 일본의 대신들과 경시총감으로부터 “조선인 보호에 책임을 갖고 진력하겠다”는 다짐을 받았다는 정도였습니다. 이유는 일제의 철통같은 보도통제 때문이었죠. 자국의 참사를 대서특필하는 것도 마뜩치 않은 데다 무엇보다 조선인에 대한 만행을 숨기고 싶었던 겁니다.

대지진 직후부터 간토 지방에는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우물에 독약을 풀었다’ 등 근거 없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넋이 나간 판에 이런 괴이한 말들이 나돌자 일인들은 자경단(自警團)을 조직해 ‘조선인 사냥’에 혈안이 됐습니다. 일본경찰과 군대도 이들에게 무기를 주고 학살에 가세했습니다. 애초 유언비어도 난국에 빠진 일본정부가 일부러 위기감을 조성하고 ‘국민총동원’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지어낸 것이라는 게 정설입니다.

엄격한 보도통제 속에서도 동아일보는 간토대지진 때 조선 동포들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운 일제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1923년 9월 23일자 만화는 폭탄을 지녔다는 조선인에게서 능금밖에 나오지 않았고, 조선인이 독약을 탔다는 우물을 검사하니 아무 일이 없었다는 사실을 그리며 “터무니없는 말로 누명을 씌우지 말라”고 질타했다.
엄격한 보도통제 속에서도 동아일보는 간토대지진 때 조선 동포들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운 일제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1923년 9월 23일자 만화는 폭탄을 지녔다는 조선인에게서 능금밖에 나오지 않았고, 조선인이 독약을 탔다는 우물을 검사하니 아무 일이 없었다는 사실을 그리며 “터무니없는 말로 누명을 씌우지 말라”고 질타했다.
강력한 통제에도 불구하고 동아일보는 도쿄 탈출 유학생들의 증언을 다룬 9월 6일자 호외에서 ‘기차에서 자경대가 조선인인 줄 알면 끌어내려 매우 위험했다.(이하 36행 삭제)’라고 자경단의 실체와 총독부의 검열을 폭로한 것을 시작으로 진실을 알리기 위해 부단히 싸웠습니다. 그러다보니 압수 기사도 줄을 이었죠. 9월 23일자에는 조선인이 독약을 풀었다는 우물을 검사해보니 아무 일 없더라는 만화를 실었다가 압수당하기도 했습니다. 조선동포 학살 은폐에 급급한 일제에 △조선인 피해자 수를 발표할 것 △조선인 폭동설이 근거 없는 악선전임을 세계에 석명할 것 △가해자를 철저히 규탄해 사자의 원혼을 위로할 것을 당당히 요구한 11월 19일자 사설 ‘다시 당국자에게 경고함’이 살아남은 것이 이례적입니다.

간토대지진 조선동포 학살 100주년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도 일본의 태도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희생자 수 역시 상해임시정부 독립신문이 조사한 6661명이 정설로 받아들여지지만 정확한 것은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정경준 기자 news91@donga.com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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