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당시 일제 경찰간부 황옥 이야기입니다. 그는 경기도경찰부 소속 경부였죠. 경부는 지금의 경위 또는 경감과 비슷한 계급입니다. 이 황옥이 의열단 폭탄공격 계획의 주모자라고 조선총독부가 발표했습니다. 1923년 4월 12일의 일이었죠. 이날 자 동아일보 호외를 본 사람들은 의열단의 대담한 시도에 한 번 놀라고 일제 경찰이 주범이라는데 또 한 번 놀랐죠. 2016년 개봉한 영화 ‘밀정’을 기억하실 겁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이었죠.
이 사건은 의열단의 ‘제2차 암살·파괴 계획’으로 불립니다. 18명이 검거되고 파괴용 암살용 방화용 등 세 가지 용도의 최신 폭탄 36개와 권총 5정, 실탄 155발, 조선혁명선언 등 문건이 압수된 것만 봐도 규모를 짐작할 수 있죠.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은행 경성우편국 등과 총독 정무총감 경무총감 등이 파괴 및 암살 목록에 올랐습니다. 계획대로 됐다면 독립운동의 양상이 달라지기에 충분했죠.
의열단장 김원봉은 먼저 조선무산자동맹회장 김한에게 실행을 맡겼습니다. 그런데 김한이 이해 1월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김상옥과 연루돼 붙잡히고 말았죠. 김한의 뒤를 이은 사람이 김시현이었습니다. 일본 메이지대학을 졸업한 뒤 1919년 중국으로 건너가 김원봉을 만나 의기투합했죠. 다시 경성으로 와서 황옥과 친분을 맺게 됐습니다. 김시현은 황옥으로부터 여비 50원을 받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하기도 했죠.
법원 서기이던 황옥은 1920년 경부로 특채돼 정보를 충실하게 수집했습니다. 그런데 김시현을 도울 무렵에는 고려공산당 국내지부 간부가 돼 있었죠. 황옥은 1923년 김상옥의 배후를 캐려고 중국 출장을 갔을 때 김원봉과 만나 의열단에도 가입했습니다. 경성으로 돌아오면서 문제의 폭탄을 김시현 등과 함께 몰래 들여왔죠. 이때 황옥은 일제 경찰로 위장한 동지였습니다. 국경 검문을 피할 여행증을 만들어주고 정보도 제공하는 조력자였죠.
황옥이 잡혔을 때 여론은 그를 일제의 끄나풀로 의심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경무국장은 ‘호랑이 새끼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라’고 강조했거든요. 독립운동가를 잡는다면 독립운동을 해도 봐준다는 뜻이었습니다. 밀정이 활개 치는 분위기가 됐죠. 동아일보가 횡설수설에서 ‘사람을 보거든 정탐으로 알라’는 새 표어가 필요할 때라고 지적할 정도였습니다.
예심 결과 황옥이 주범으로 발표되자 여론은 바뀝니다. 그가 감옥에 갇힌 뒤 생계가 어려워진 아내와 네 자녀에게 주라며 기부금이 동아일보에 접수되기도 했죠. 경무국장과 경기도경찰부장 고등경찰과장이 사표를 냈다는 기사도 실렸습니다. 부하 직원이 중죄인이 됐으니 직속상관들이 책임을 지려던 것이죠. 여기서 끝났다면 ‘황옥 의사’가 될 법도 했습니다.
재판 때 다시 반전이 일어납니다. 황옥 자신이 눈물을 글썽이며 모두 독립투사를 잡기 위한 의도된 행동이었다고 진술했거든요. 전직 경찰부장의 지휘를 받아 실행한 일이며 실적을 올리면 승진할 것으로 기대했다고 했습니다. 폭탄 밀반입을 보고하지 않은 이유는 결정적 시점을 노렸기 때문이었다고 했죠. 듣던 의열단 피고 한 명은 “우리를 모두 잡아주고 자기 사복을 채우겠다는 악마의 행동을 이제야 아니 분하기 그지없다”며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결국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은 황옥은 은사와 감형으로 4년2개월 복역했습니다. 1929년 가출옥 뒤에는 경성에 머물며 옛 동지들을 만났다고 합니다. 해방 후 악질 친일 경찰 김태석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재판 증인으로 나와 의열단사건을 증언했고요. 6‧25전쟁 때 납북돼 그 후 행적은 알 수 없죠. 이쯤해서 다시 궁금증이 일어납니다. 과연 황옥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요? 일제강점기 때 어느 편인지 알 수 없는 사람이 황옥 한 사람뿐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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