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8월 31일 경성역은 울음소리로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슬픔을 털어버리려는지 기차 안에서 ‘2천만 동포 만세!’를 외치자 기차 밖 전송객들은 ‘하와이동포 만세!’로 화답했죠. ‘잘 있으세요!’ ‘잘 가시오!’ 마지막 인사말은 울음에 막혀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2개월간 고국방문을 마친 하와이 한인기독학원 남녀학생과 인솔자 23명을 태운 특별급행열차가 떠나는 순간이었죠. 이 장면은 동아일보 1923년 9월 1일자 3면 머리기사로 남아 있습니다.
한인기독학원 고국방문단은 7월 2일 도착했습니다. 동포학생들이 공부할 건물을 짓는데 필요한 돈을 모금하기 위해서였죠. 모자라는 3만 원은 지금 3억 원이 넘습니다. 방문단은 경성을 시작으로 곳곳을 다니며 동포들에게 정성을 호소했죠. 단순히 돈만 달라는 건 아니었고 음악회와 야구 배구 같은 다양한 행사를 했습니다. 15~26세의 남학생 12명과 여학생 8명은 피아노와 플루트 기타 연주는 물론 운동도 잘하는 학생들이었죠.
이들의 부모는 1903년 시작된 대한제국 최초의 이민자들이었습니다. 이 무렵 7000명 넘는 한인들이 하와이로 건너가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가 됐죠. 사시사철 꽃피는 지상낙원이라지만 말도 안 통하고 하루 10시간의 고된 농장 일에 시달렸습니다. 보호해줄 국가도 없어 결국 되돌아오거나 본토로 건너가기도 했지만 5000여 명이 주로 사탕수수 노동자로 일했죠. 어려운 형편에도 교육에 힘썼고 독립운동자금도 망설이지 않고 냈습니다.
방문단 중 절반 넘는 학생들이 하와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말도 서툴고 부모님 고향도 본 적이 없었죠. 기차 밖으로 모내기 모습을 본 여학생들은 “왜 풀을 심고 있나요?”고 물었습니다. 사탕수수만 보던 눈에는 모가 풀로 비쳤죠. 첫날 여장을 푼 곳에 40대 중반 남자가 찾아왔죠. 한 여학생을 찾아 “내가 너의 큰아비다”라며 붙잡고 눈물을 쏟았습니다. 17년 전 이민 간 남동생의 조카딸을 처음 만난 것이죠. 함께 온 큰어머니와 사촌 여동생도 서로 얼싸안고 울었습니다.
YMCA를 중심으로 구성된 환영위원회는 월남 이상재가 이끌었죠. 기독교진영뿐만 아니라 학교와 사회단체 신문사들이 힘을 보탰습니다. 지방에서도 유지와 사회단체들이 정성껏 이들을 맞았습니다. 동아일보도 여러 번 사설을 쓰고 강연회도 여는 등 적극 나섰죠. 1922년부터 ‘재외동포 위문회’를 조직했던 동아일보로서는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하와이 만국기자대회에 참석했던 김동성 기자가 전해준 동포들의 생활상도 기억에 남아 있었겠죠.
다만 방문단이 오가는 내내 일제의 그림자가 따라다녔습니다. 고국방문 자체가 일제의 승인 없이는 불가능했죠. 일제는 해외동포들이 발전한 고국을 보게 되면 독립의지가 꺾일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와이 방문단 일정에도 황해도 경찰부장 다과회와 함흥형무소 관람 등이 끼어들었죠. 더구나 한인기독학원 공사는 임시대통령 이승만이 주도했습니다. 이승만은 1922년 워싱턴군축회의에서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한 뒤 상하이 대신 하와이로 돌아가 종교와 교육사업에 매달렸죠. 이 때문에 이승만이 일제와 손잡았다는 비난이 꽤 높았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교묘한 이간책이 성공했다고 단정할 순 없습니다. 방문단장 민찬호는 독립문·독립관을 찾아 독립문 세울 때 정초식을 했고 축하식 때는 축하노래를 불렀던 추억을 떠올렸죠. 강연회에서도 민찬호와 부단장 김영우는 “하와이에 있는 우리 자녀에게 무엇보다도 조선혼을 깊이 넣어주는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까?”라고 외쳤고요. 여자감독 김노디는 남녀평등을 부르짖어 여러 차례 박수를 받았습니다. 방문단이 수원에 갔을 때는 일제 경찰이 만세삼창을 막는 일까지 벌어졌죠. 모금에 동참한 이들은 독립운동자금을 낸다는 마음이기도 했습니다. 주어진 여건을 최대한 활용한 지혜라고 봐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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