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관계 악화로 문화재 복원 차질
1912년 日로 불법반출 후지타 남작 부친 49재 맞아 그렸을 가능성 높아
문화재청 “日장례-유물 기록 조사, 확실한 훼손 확인전까진 제거 유보”
부석사 불상 판결후 양국 교류 급랭… 日소장 韓고문헌 촬영-복사도 금지
한일 관계 악화 여파로 문화재 당국이 일제강점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국보 제101호)의 붉은 말 그림을 제거하지 못한 것으로 확인됐다. 국권 침탈 이후 일제에 의해 원래의 자리에서 뽑혀 110년을 떠돈 고려석탑의 온전한 원형을 복원하기 위해선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화재청 산하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지광국사탑 해체 보수 과정에서 상층 기단석(탑 몸체를 받치는 아랫돌)에서 발견된 붉은색 말 그림을 일단 남겨 놓기로 했다고 27일 밝혔다. 최근 보수를 마친 지광국사탑은 문화재위원회의 결정이 나오는 대로 강원 원주시 법천사지로 옮겨질 예정이다. 이 그림은 전문가 조사 결과 1912년 일본 오사카로 지광국사탑을 불법 반출한 후지타 헤이타로(藤田平太郞) 남작이 부친 후지타 덴자부로(藤田傳三郞·1843∼1912)의 49재를 맞아 명복을 빌기 위해 그렸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석탑에선 말 그림 전례가 없는 데다 일본 장례 문화인 ‘에마(繪馬) 풍습’의 양식과 유사하다는 게 판단 근거다. 에마 풍습은 나무판 등에 말 그림을 그려 신사나 절에 두는 장례 문화다. 일본 대기업 도와홀딩스의 창립자인 덴자부로가 생전 기병대에서 복무한 사실도 감안됐다.
문제의 그림이 석탑 조성 당시인 고려시대에 그려진 게 아니고, 불법 반출자의 사적인 용도로 나중에 그려진 것이라면 문화재 ‘훼손’에 해당한다. 이에 따라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전문가들과의 자문회의에서 말 그림의 정확한 조성 경위를 파악하기 위해 후지타 가족묘를 관리하는 사찰의 장례 기록과 후지타 미술관의 유물 관리 기록을 조사하기로 결정했다. 말 그림을 제거하려면 헤이타로에 의한 훼손이 구체적으로 확인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지타 가문은 우리 문화재 당국의 조사 요청을 거부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쓰시마 부석사 불상 절도사건 판결과 한일 관계 악화를 계기로 일본 내 문화재 소장자들이 한국의 협조 요청에 부정적인 데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화재청은 확실한 훼손 근거가 확인되지 않으면 말 그림을 당장 제거하기는 힘들다는 입장이다.
앞서 2017년 1월 대전지법은 한국인 절도단이 쓰시마 사찰에서 훔친 불상에 대해 일본 측의 반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충남 서산 부석사에 넘기라고 판결했다. 당시 일본 정부는 “명백한 도난품을 반환하지 않는 건 국제법에도 어긋난다”며 유감을 표시했다. 이 판결 이후 한일 간 문화재 교류는 사실상 얼어붙은 상태다. 국립중앙박물관은 2018년 고려 건국 1100주년을 맞아 ‘대(大)고려전’을 개최하며 일본 내 고려불화 대여를 추진했지만 일본 측의 비협조로 불발됐다. 당시 일본 문화청은 “대부분의 고려불화는 일본 사찰들이 갖고 있는데, 쓰시마 불상 판결 이후 한국으로 대여하는 것을 꺼리고 있다”고 회신했다.
문화재뿐만 아니라 학술 분야에서의 한일 교류도 차질을 빚고 있다. 일제강점기 수집된 한국 고문헌을 다수 소장한 일본의 한 대학은 한국 연구자들의 자료 촬영과 복사를 일절 금지하고 있다. 한일 관계가 악화되면서 한국 연구자들의 자료 접근을 한층 엄격하게 막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 인해 국내 연구자들이 해당 대학을 찾아가 하루 종일 한국 고문헌을 수기로 베껴 쓰는 비효율을 감내하고 있다. 한 연구자는 “필사하는 내내 일본인 대학원생들이 앞에 앉아 감시하는 바람에 자료 촬영이 쉽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