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돌뱅이의 삶을 그린 소설 ‘메밀꽃 필 무렵’. 주인공 허생원은 젊은 날 봉평장 물레방앗간에서 만난 처녀와의 하룻밤 첫사랑을 평생 간직하며 사는 순정의 왼손잡이 장돌뱅이다. 이루지 못한 사랑을 떠올리며 봉평장을 오가던 그와 왼손잡이 동이의 만남은 독자들에게 훗날을 상상하게 만든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강원 봉평은 소설가 이효석의 표현이 한몫해서 여러 사람에게 사랑받는 명소가 됐다. 봉평에 오면 이효석문학예술촌을 거쳐 메밀 막국수 한 그릇을 먹는 것이 관광객들의 코스가 됐다. 인구 5000여 명의 한적한 지역이지만 봉평의 메밀국숫집은 30여 개에 이른다.
그곳에서 만난 오봉순 대표는 경남 밀양 출신으로 아담한 체구의 여성이다. 그는 27년 전 30세의 나이로 아무런 연고가 없는 봉평에 왔다. 물레방앗간 첫사랑을 놓쳐 참담한 심정이 된 소설 속 허생원처럼 어려운 일을 겪고 혈혈단신 강원도까지 온 처지였다.
옥수수도 삶아 팔아보고 고깃집도 운영하며 음식 사업 울타리에서 다양하게 도전하던 그의 눈에 운명처럼 메밀이 들어왔다. 그는 봉평에 ‘미가연’이란 식당을 차리고 메밀을 이런저런 각도에서 분석했다. 메밀의 품종별 차이나 메밀싹도 쉽게 지나치지 않았다. 막국숫집에서 흔히 사용하는 단메밀에 씨앗같이 작은 크기의 쓴메밀의 적합한 혼합 비율을 찾아냈고, 그것을 얼음물로 반죽하여 자가 제면을 거쳤다. 외국산과 비교할 때 훨씬 비싼 국산 메밀을 100% 사용하는 것도 쉽지 않다. 거기에 단메밀 가격의 두 배인 쓴메밀을 절반이나 섞을 정도로 그의 막국수에 대한 애정은 남다르다.
이곳에서는 날씬한 콩나물처럼 생긴 메밀싹 고명을 국수와 비빔밥 어디에든 풍성하게 올려준다. 쓴메밀과 메밀싹에는 메밀의 항산화 성분인 루틴 비율이 일반 메밀보다 월등히 높아 고명의 효과뿐만 아니라 건강에도 좋다.
메밀국수에 들기름, 메밀싹, 깨, 김의 간단한 구성으로 메밀의 기본 맛이 제대로 나온다. 육회 비빔국수를 주문하면 푸짐한 육회의 양에 먼저 놀라게 된다. 그것도 대관령 한우란다. 육회와 메밀의 또 다른 조화를 알게 해주는 ‘내 땅 내 음식’의 실현이다.
오 대표는 미가연 근처에 다음 작업을 준비하기 위해 작은 메밀음식문화연구소도 만들었다. 요즘은 어릴 적 어머니가 만들어주던 ‘지름장’(경상도식 조선간장) 국수를 꿈꾸며 메뉴 개발을 하고 있다.
메밀꽃 필 무렵 허생원이 첫사랑과 해후했다면 그 후 어떻게 살았을까? 메밀막국수를 한입 먹으면 메밀밭의 자연이 주는 행복감과 문학적 상상력이 절로 피어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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