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민족자결주의 낳은 두 사람이 오늘의 세계를 본다면?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2월 9일 11시 40분


1924년 2월 5일


플래시백
1924년 1월 21일 니콜라이 레닌이 사망했습니다. 러시아에서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혁명을 성공시킨 그 사람이죠. 54년의 길진 않았지만 불꽃처럼 타올랐던 생애였습니다. 20년 간 추방과 유형 망명을 거듭해야 했던 혹독한 탄압 아래서도 ‘최후에 웃는 자가 정말로 웃는 자’라며 혁명 의지를 굽히지 않았죠. 말년에는 총격을 당하고 병까지 앓으면서 누워있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이 때문에 레닌이 죽었다는 가짜뉴스가 잊을 만하면 나왔죠. 그가 빨리 죽었으면 하는 자본주의 진영의 희망도 레닌 사망 뉴스가 반복되는 원인이었다고 합니다.

약 보름 뒤인 2월 3일 미국 제28대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68세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윌슨 하면 민족자결주의가 가장 먼저 떠오르죠. 그는 1918년에 각 민족이 자기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해야 민주주의는 가능하며 모든 민족이 자결권을 가질 때 세계에 평화가 찾아든다고 외쳤습니다. 윌슨은 민족자결주의가 포함된 14개조를 들고 제1차 세계대전의 처리방안을 논의하는 파리강화회의에 직접 참석해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습니다. 특히 나라를 잃은 약소민족들은 민족자결주의를 복음이나 마찬가지로 여겼죠.



하지만 민족자결주의의 저작권은 윌슨이 아니라 레닌에게 있습니다. 레닌은 1917년 러시아혁명 이전에 사회주의자라면 민족 간의 억압에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했죠. 사회주의는 완전한 민주주의이므로 어떠한 억압과 착취도 사라져야 한다고 했고요. 물론 서유럽 선진국에서 먼저 사회주의혁명이 성공하려면 후진국이나 식민지의 민족운동이 필요하다는 전략적 생각이 결정적으로 작용했죠. 이런 배경 때문에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가 민족자결주의를 먼저 앞세우자 윌슨이 부랴부랴 14개조를 제창하게 됐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민족자결주의는 일제 밑에서 신음하던 우리 민족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민족자결주의가 없었다면 3·1운동의 불길이 그렇게 강렬하게 타오르진 않았겠죠.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사회주의에 기울었던 배경에도 민족해방이 있었습니다. 독립을 위해서라면 레닌의 공산주의든, 윌슨의 14개조든 상관없었죠. 여운형 같은 이는 1918년 상하이에서 윌슨의 특사인 찰스 크레인으로부터 독립운동을 돕겠다는 말을 듣고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려고 동분서주했습니다. 1922년이 되자 여운형은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해 러시아의 지원을 기대했죠.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쓴 박은식은 러시아혁명은 ‘세계개조의 제일 첫 번째 동기’로, 민족자결주의는 ‘세계개조의 진보’로 각각 평가했습니다.



동아일보 1924년 2월 5일자 사설 ‘윌손 씨를 조함’은 새해에 2대 위인을 잃었다며 윌슨을 민주주의의 최고 이상가이자 완성자로, 레닌은 사회주의 실현의 제일인자로 각각 소개했습니다. 사설이 ‘두 사람의 이상은 뒤에 남은 인류의 손으로 조만간 세상에 실현되고야 말 것’이라고 낙관했던 점은 당시의 정서를 그대로 반영했다고 볼 수 있죠. 동아일보는 레닌 사망 직후 러시아의 문호 막심 고리키의 ‘레닌’을 5회에 걸쳐 싣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민족자결주의는 말 그대로 이상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윌슨은 유럽의 몇몇 약소민족에 집중했고 그마저도 현실 정치의 높은 벽에 가로막혀 실망감만 낳았죠. 파리강화회의에 간 우리 대표를 인정해준 강대국은 한 나라도 없었죠. 레닌 역시 식민지 민족을 지원한다고 했지만 그 이후 소련의 역사는 약소민족의 생존보다 자국의 이익 우선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드러냈을 뿐입니다. 단적인 사례가 영문도 모르고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해 말 못할 고난을 겪은 고려인들의 운명이었죠.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많은 소수민족들이 주변 강국의 발톱 아래 숨죽인 채 피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이진 기자 leej@donga.com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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