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달리 ‘올봄에는 어떤 아이템이 유행할까요?’ 하는 질문을 자주 받고 있다. 이들이 색다른 스타일을 기대하는 것은 지루했던 시간이 길었기 때문일 것이다. 불필요한 외출 자제, 장기화된 재택근무 등 이전과 달라진 라이프스타일은 우리가 옷을 선택하는 기준마저 바꿔놓았다. 특히 편안함은 의류를 구입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하는 중요한 키워드가 됐다. 실제 코로나19 기간 중 진행된 소비자 조사에서 의류를 구입하는 계기를 묻는 질문에 계절 변화, 기분 전환의 이유가 아닌 ‘옷이 낡았을 때 쇼핑한다’는 응답이 현저히 증가한 점에서 소비자들의 실용적 성향이 강해진 점도 엿볼 수 있었다.
매 시즌 새로운 트렌드를 소개하는 디자이너들에게도 최근 패션 소비 심리는 중요한 이슈로 다가왔을 것이다. 재기 넘쳤던 빅토리아 토마스의 2021년 봄여름 컬렉션에서는 한 가지 아이템을 뒤집어 입는 방식으로 새로운 룩을 제안하는 아이디어가 핵심이 됐다. 출근복으로 적절한 핀스트라이프 셔츠 드레스를 찰랑거리는 실크 안감의 숨겨진 부분이 드러나도록 뒤집으면 애프터 식스에 어울리는 아이템으로 변신하는 방식이다. 하나의 옷을 여러 가지로 활용할 수 있는 실용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지금의 우리가 패션에 기대하는 바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사례가 아닐까 한다.
올봄 패션의 새로운 키워드로 떠오른 ‘워크레저’는 일(Work)과 여가(Leisure)라는 대조적 성격의 단어가 조합된 오피스웨어의 트렌드를 설명하는 신조어다. 유연근무제가 보편화됨에 따라 포멀함을 벗고, 한층 편안하고 여유로운 디자인으로 재해석된 패션의 ‘뉴노멀’을 재정의하는 키워드라 할 수 있겠다. 워크레저는 과거 ‘화이트칼라’의 전형적 스타일로 여겨지던 잘 재단된 슈트에서 탈피해 편안함을 우선시하는 실루엣으로 업무와 여가 사이의 경계를 허문다.
워크레저는 지난해 내내 큰 이슈를 몰고왔던 #stayathomestyle(집콕패션)에서 발전된 개념이다. 캐주얼한 아이템으로 여겨졌던 니트 탑과 카디건, 저지 티셔츠, 오버사이즈 셔츠, 레깅스 등을 중심으로 앳홈스타일과 오피스룩의 경계를 허물어 편안함을 우선으로 하는 스타일을 선보인다. 꼭 맞게 재단돼 움직임이 불편한 슈트 대신 밴딩이나 조절 가능한 핏이 디자인의 핵심이 되고, 출퇴근은 물론 재택근무를 하거나 휴식을 취할 때도 잘 어울려 더욱 다양한 활동이 가능하도록 고안된다. 화상회의가 일상화되면서 하의보다 상의에 포인트를 주는 데스크패션(#abovekey-boarddressing)도 워크레저 패션의 중요한 경향 중 하나다.
출근룩의 대명사인 재킷은 딱딱한 테일러링 무드에서 벗어나 보다 유연한 변화를 꾀하고 있다. 셔츠로도, 재킷으로도 활용 가능한 하이브리드 재킷이 강세를 보이면서 어깨 패드와 다트를 대신해 필요에 따라 조절이 가능한 스트링디테일이나 고무 밴드를 활용한 여유로움이 핵심이 된다. 하의 역시 완고한 테일러링에서 벗어나 편안함을 강조한 조거 팬츠나 여유로운 바지통에 비해 좁은 바짓부리로 일상적 편안함을 주는 테이퍼드 팬츠가 어울린다.
셋업의 개념 또한 달라졌다. 지금까지는 동일 소재와 동일 컬러로 재킷과 하의의 슈트 구성을 해왔다면 이제는 블루종과 팬츠, 셔츠와 팬츠, 블라우스와 스커트, 니트 세트 등 어울리는 소재와 컬러로 구성된 다양한 아이템 간 매칭 세트로 변화하고 있다. 특히 캐주얼한 상하의를 고급 소재로 제안하는 럭셔리 라운지세트는 투마일웨어로는 물론 오피스룩으로도 뛰어난 활용도를 선보인다.
화상회의 패션 경향에 따라 상의 쪽으로 시선을 끌기 위해서 주로 네크라인 주변을 강조하는 디테일도 많아지고 있다. 큰 칼라와 러플 등의 디자인 포인트와 우아하게 네크 부분이 드레이프되는 실크 블라우스와 타이 블라우스 등이 여성복에서는 중요하게 부각된다.
남녀를 막론하고 오버사이즈 셔츠는 올 봄 가장 활용도 높은 아이템이 될 수 있겠다. 긴 기장의 오버사이즈 셔츠는 니트 베스트나 롱 셔킷과 함께 코디돼 스마트한 캐주얼룩으로 제안되기도 한다. 여성복에서는 셔츠 본연의 기능은 물론 드레스와 아우터로 활용되는 등 다양한 쓰임새를 자랑한다. 넉넉한 오버 핏에 허리 부분에 포인트를 둬 편안하게 또는 격식을 차리게도 입을 수 있다. 레깅스나 팬츠와 함께 레이어드해 이른바 드로어즈룩(Drouser Look·Dress+Trouser 드레스와 하의를 레이어드하는 스타일)으로 스마트 캐주얼의 세련된 감각을 자랑할 수도 있다.
코로나19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이렇게 변화된 패션 트렌드는 여전히 유효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완벽하게 일상으로 복귀해 사무실로 출근할 때 쯤엔 편안함을 강조하는 것은 물론이고 기능적인 활동성에 초점을 둔, 워크레저에서 한발 더 나아간 새로운 키워드의 부상이 전망된다. 일례로 핏과 소재, 디자인 측면에서 스포츠웨어의 영향을 받은 새로운 패션 경향은 스포츠룩에 우아함을 더한 스타일이라는 의미로 애스플로(Ath-flow) 패션이라 불린다. 이미 필립 림 등 해외 유명 디자이너들은 스포티브한 디테일을 활용한 오버사이즈 트렌치코트와 슬릿을 넣은 여유로운 저지 팬츠, 캐주얼한 점프 슈트 등을 항균 가공한 신소재로 선보이며 새로운 하이브리드 패션 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과연 일과 휴식의 양립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은 잠시 접어두고, 일하며 즐기는 말 그대로 워크레저를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시기가 빠르게 도래하길 바란다. 적어도 일할 때 입는 옷과 휴식을 즐길 때 입는 옷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아도 되니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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