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은 우리 언론계에 도전과 응전이 집중된 시기였습니다. 도전은 말할 것도 없이 4월에 박춘금이 앞장선 친일단체 각파유지연맹의 동아일보 임원들 폭행‧협박이었죠(2월 23일자 ‘친일파를 원숭이에 빗댔다며 동아일보 임원들 몰매’ 참조). 항일 논조에 일제가 압수 삭제 같은 탄압을 하는 것만으로는 모자랐는지 친일파들이 직접 권총 들고 주먹질까지 해댄 것인 만큼 상황이 심각했습니다. 우리 언론계 전체가 관권과 폭력 앞에서 눈치를 보며 움츠러들 수밖에 없는 위기였죠.
우리 민족은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회단체들이 마치 내 일처럼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섰죠. 그도 그럴 것이 일제가 언론뿐만 아니라 집회까지 마구잡이로 금지한 탓이었습니다. 이 무렵 조선노농총동맹과 조선청년총동맹이 조직돼 본격적인 활동에 나서려 했죠. 그러나 일제는 두 단체가 창립총회를 마치자마자 치안에 해롭다며 모든 집회를 불허했습니다. 이는 오히려 일제 탄압에 저항하는 눈 뭉치가 점점 커질 계기를 준 셈이었죠.
이 해 6월 7일 언론 종교 사상 법조 학생 여성 교육 등 각 분야 31개 단체의 대표 100여명이 ‘언론‧집회 압박 탄핵회’를 만들었습니다. 사회주의 성향의 조선노농총동맹과 조선청년총동맹이 앞장서자 조선변호사협회가 가세하고 동아 시대 조선일보의 3개 신문사도 참여하는 등 좌우를 가리지 않고 손을 맞잡았죠. 3‧1운동 이후 국제회의에 독립을 호소했으나 아무 소득이 없어 가라앉을 대로 가라앉았던 우리에게 다시 구심점이 생기는 순간이었습니다.
동아일보는 ‘항거와 효과’ 사설에서 ‘언론‧집회에 대한 압박은 곧 사상에 대한 압박이요 사상에 대한 압박은 곧 사회발전에 대한 압박이며 인류향상에 대한 압박이다…미친 자의 칼 아래서 항거가 어렵다 말라. 흐르는 피가 마침내 그 (칼)날을 꺾을 것이다’라고 외쳤습니다. 이런 기세를 몰아 탄핵회는 일제의 언론‧집회 탄압사례를 조사해 6월 20일 대대적인 탄핵대회를 열기로 했죠. 평화적인 대회를 통해 일제 문화정치의 실체를 폭로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두 손 놓고 있을 일제가 아니었죠. 당일에 대회를 금지했습니다. 이유는 ‘치안 불안과 보안법 위반’. 게다가 실행위원 5명을 구속하고 미처 금지된 사실을 모르고 모여든 인파를 해산시키려고 기마경찰까지 동원했죠. 동아일보는 ‘당시의 광경은 참으로 살기가 넘치는 참담한 지경’이라고 전했습니다. 그래도 탄핵회는 포기하지 않았죠. 제2차 대표회의를 열어 실행위원을 새로 뽑고 △7월 20일 탄핵대회와 시위운동 개최 △언론‧집회 탄압 사실의 세계 선포 △언론‧집회의 자유를 위해 굳은 단결로 최선을 다해 노력 등 3개항을 결의했습니다.
이 대표회의에서는 이 해 1월 1일~6월 20일의 언론‧집회 탄압 실태도 보고됐죠. 압수는 △일간지 동아일보 15회, 조선일보 13회, 시대일보 9회 △주간지 조선지광 7회 △월간지 개벽 3회였습니다. 집회 금지는 3월 1일~6월 20일 경성에서만 13건이었다니까 전체로는 훨씬 더 많았겠죠. 특히 원산노동회는 ‘5월 1일 ‘메이데이’ 기념강연도 금지! 원유회 즉 소풍도 금지! 집행위원 4명의 산책 겸 점심 나들이에는 형사 7명이 미행!‘을 당했답니다.
그러나 한 달 간 준비한 탄핵대회는 열리지 못했습니다. ‘사정에 의해 당분간 중단하고 추후 다시 발표함’이라는 짧은 안내문만 신문에 실렸죠. 당초 일제의 언론‧집회 압살에 대한 저항은 4월 민중대회 개최로부터 출발했습니다. 민중대회가 금지되자 두 달 뒤 탄핵대회를 열려고 했지만 또 금지됐고 다시 열려던 탄핵대회는 석연찮게 무산된 것이었죠. 동아일보는 6월 ‘탄핵대회 금지’ 사설에서 ‘금지하니 그칠 밖에 없다. 금지뿐이랴. 검속까지 했다. 우리가 무슨 실력으로 이를 받지 않으랴마는 당국의 무도 무리함은 갈수록 폭로된다’고 비판했습니다. 일제가 탄압할수록 허울뿐인 문화정치의 실상을 드러낼 뿐이라고 지적한 것이죠.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