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버턴 감독의 영화 ‘빅 피쉬’(2003년)에서 아들은 아버지가 잡을 뻔했다는 거대한 물고기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 말할 때마다 더 커지는 듯한 아버지의 물고기 이야기처럼, 한시의 세계에도 허풍처럼 느껴지는 과장된 표현이 특기인 시인이 있다. 이백(李白·701∼762)은 흰 머리가 900m쯤 자랐다거나(백발삼천장·白髮三千丈) 눈꽃 크기가 손만 하다고(설화대여수·雪花大如手) 쓰곤 했다. 그가 송사(訟事)로 인해 정직(停職)을 당한 아우뻘 되는 이에게 준 시는 다음과 같다.
시의 전반부는 도연명의 일화다. 이호를 위로하기 위해 녹봉 때문에 지조를 굽힐 수 없어 벼슬을 버리고 떠난 도연명의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이야기는 이윽고 현실을 벗어나 신선의 세계로 이어진다. 이백은 시에서 신선세계 이야기하길 즐겼다. 시에 등장하는 ‘자라(鼇)’ 역시 상상의 동물이다. ‘열자(列子)’에는 바다 위 신선들의 산 다섯 좌를 떠받치고 있다는 거대한 자라 이야기가 나온다(탕문·湯問). 그 자라들은 세 마리씩 짝을 이뤄 산 하나씩을 지고 있었는데, 용백지국(龍伯之國)의 거인이 여섯 마리 자라를 한꺼번에 낚아버려서 지고 있던 두 좌의 산이 사라졌다고 한다. 이백은 거인의 거대한 자라 낚기를 통해 이호에게 잗다란 현실의 문제에 연연하지 말라고 권유한 것이다.
‘자라’는 이백이 즐겨 쓴 이미지 중 하나이기도 했다. 역적이나 간신 등 제거해야 할 악당들을 비유하거나 자신이 꿈꿨던 이상을 암시한다. 그래서 “생각은 큰 자라를 베는 데 있으니, 어찌 큰 고래 회 뜨는 것을 논하랴(意在斬巨鼇, 何論회長鯨)”(聞李太尉大擧秦兵百萬出征東南·문이태위대거진병백만출정동남)처럼 자신의 기백을 드러낼 때 많이 사용했다. 그래서 이백을 흠모했던 후배 시인들 역시 그의 시를 칭송할 때 자라를 떠올리곤 했다.
이백이 신선세계에 각별한 관심을 둔 것처럼 팀 버턴 감독도 환상세계에 특별한 애착을 보였다. ‘빅 피쉬’에서도 감독의 장기가 유감없이 발휘된다. 허구와 사실을 넘나들던 아버지는 결국 그 경계를 넘어 이야기 자체가 된다. 아들의 상상 속 아버지가 최후에 거대한 물고기가 됐던 것처럼, 이백 역시 후대의 기록에 ‘자라 낚는 나그네(海上釣鼇客)’라는 이야기로 남았다(후청록·侯鯖錄).
영화 속 빅 피쉬는 포획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유를, 자신의 길을 간다는 점에서 이상주의자를 떠올리게 한다. 이백 역시 자유를 열망하며 현실에 구속되지 않고 이상을 고수했다. 이백의 시를 읽노라면 위대한 시인은 꿈꾸던 이미지로 남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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