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4월 1일 동아일보가 네 돌을 맞았습니다. 임직원들은 4년이 아니라 한 10년은 지났다고 느꼈을 법합니다. 일제의 압박이 심했던 반면에 독자들의 기대는 컸으니까요. 그동안 한 차례 무기정간에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의 압수와 삭제를 당했습니다. 그래도 독자들을 믿고 민족 해방과 신문화 건설의 양대 과제를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갔습니다. 이날 자 사설에서 ‘왈 청년운동, 왈 사회운동, 왈 물산장려, 왈 민립대학의 각 방면 운동에서 항상 고무 진작의 임무를 맡았다’고 스스로 평가한 근거였죠. 사설의 표현 그대로 ‘마음과 힘을 다했고 민중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기를 전전긍긍’한 4년이었습니다.
5년차에 접어든 동아일보는 새롭게 네 가지를 약속했습니다. 그 첫째가 4월 1일부터 우리 신문 역사상 처음으로 지방판을 발행한 것이었죠. 이즈음 지국체제와 통신기관이 갖춰져 지방기사가 말 그대로 폭주했습니다. 하지만 총 4개면에 지방기사를 양껏 실을 수는 없었죠. 지면 수를 늘리자니 구독료를 올려야 했습니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요. 돌파구를 찾아냈습니다. 바로 지방판 제작이었죠. 제3면을 △중앙판 △삼남판 △서북판으로 각각 만들었습니다. 중앙판에는 경기도, 삼남판에는 충청‧전라‧경상도, 서북판에는 강원‧황해‧평안‧함경도 기사를 실어 해당 지역에 보냈죠. 쪽수는 그대로여도 내용은 한층 충실해졌습니다.
둘째는 새 사옥을 짓는 것이었죠. 사옥 건설은 창간 때부터의 꿈이었으나 그동안은 옛 중앙학교 건물이었던 종로구 화동의 한옥을 썼습니다. 깨진 창문과 금간 벽 사이로 바람과 눈, 비가 대책 없이 밀려들던 월세살이였죠. 이제 경영이 꽤 안정되고 사원수도 늘어나 신사옥 건축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었습니다. 이 해 1월 임시중역회의에서 주주들이 1주당 12원 50전을 납부해 자금을 마련하기로 했죠. 3월에는 광화문에 144평을 사들여 신사옥 마련을 위한 첫 발을 뗐습니다. 6개월 뒤에는 177평을 추가로 매입해 한 발 더 나아갔죠.
셋째는 윤전기 증설이었습니다. 1920년 7월부터 시간당 약 2만 매를 찍는 마리노니 윤전기를 가동하고 있었지만 늘어나는 부수를 감당할 수 없었죠. 당시 신문 독자가 급증한 것은 세계적 현상이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이었을 겁니다. 그러다보니 윤전기 제작기술도 하루가 다르게 발전했습니다. 어제 최신 윤전기가 오늘이면 구식이 된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죠. 가격도 비싼 만큼 새 윤전기 선택은 고심에 고심을 거듭해야 하는 사안이었지만 일단 새로 장만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마침 새 윤전기를 설치할 새 사옥도 짓기로 했으니까 시점도 맞춤했죠.
마지막으로 지방순회통신제도를 시행하기로 했습니다. 경성의 본사 기자가 직접 지방취재에 나서는 방식이죠. 이미 각 지방에 지국과 분국이 200곳을 헤아리는 판에 이 무슨 중복업무인가라는 생각이 들 법도 합니다. 하지만 현지 기자가 당연하게 여기는 사안도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고 각 지역 현안을 새롭게 조명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죠. 동아일보를 전국지로 끌어올리는 효과도 기대할 만했습니다. 이 기회에 ‘학교역방기’를 연재해 지방교육 발달의 촉매역할도 하고 고군분투하는 교육공로자도 소개하기로 했죠.
하지만 이상 네 가지 약속 중 지방판 발행을 제외한 세 가지는 해를 넘겨서야 가까스로 착수할 있었습니다. 신사옥 착공과 고속 윤전기 도입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죠. 그런데 주주들이 돈을 내지 않아 속도를 높일 수 없었습니다. 1925년 2월에 미납 주주들에게 2차 독촉장을 보내야 할 지경이었죠. 지방순회통신제도 지연은 1924년 창간기념일 바로 다음날인 4월 2일 발생한 ‘식도원 폭행사건’으로 사내에 분란이 일어난 탓이었습니다. 이 내용은 다음 기회에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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