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통영의 미륵산 정상에 올라서면 한려수도에 점점이 떠 있는 섬들이 360도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햇살이 비쳐 반짝이는 잔물결. 윤슬! 에메랄드빛 바다에서 불어오는 포근한 바람에 봄이 왔음을 실감한다.
‘동양의 나폴리’로 불리는, 아니 나폴리보다 훨씬 멋진 강구항(통영항). 아침 해장국 손님들로 분주한 서호시장에는 식당마다 ‘도다리쑥국 개시’라는 글씨가 나붙었다. 해풍을 맞고 자란 어린 해쑥이 나올 즈음 도다리도 겨우내 영양분을 축적하고 포동포동 살이 올라 가장 맛이 좋다고 한다. 둘을 함께 넣고 끓인 도다리쑥국은 담백한 맛과 향이 입안 가득히 봄을 선사한다.
통영의 봄 미각(味覺) 여행엔 멍게비빔밥도 빼놓을 수 없다. 싱그럽게 톡톡 터지는 꽃멍게만큼 바다의 향을 감미롭게 표현하는 해산물은 세상에 없을 것 같다.
● 이중섭의 ‘흰소’와 청마의 ‘편지’
통영항의 등대는 끝이 뾰족한 연필 모양이다. 수많은 문필가들이 활동한 도시를 상징하는 모양의 등대다. 대하소설 ‘토지’의 소설가 박경리를 비롯해 시인 유치환 김춘수 백석, 극작가 유치진, 화가 이중섭과 전혁림 등 수많은 소설가, 시인, 음악가, 화가들이 통영에서 태어나고 활동했다. 또한 나전칠기, 옻칠, 갓, 부채, 누비, 통영오광대놀이 등 가장 많은 무형문화재를 보유한 도시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통영 기행은 골목골목을 걸어야 제맛이다. 걷다 보면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니라’고 노래했던 시인 유치환이 편지를 5000여 통이나 보냈던 청마우체국이 나타나고, 박경리의 소설 ‘김약국의 딸들’에 나오는 서문고개를 넘기도 한다.
또한 윤이상 기념관에서는 평생 고향을 그리워하며 베를린에 살았던 작곡가가 타고 다녔던 벤츠 자동차도 만난다. 강구항의 쪽빛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동피랑 언덕에는 그리스 산토리니를 방불케 하는 감성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작가들이 2년마다 한 번씩 새롭게 그려 넣는 벽화는 바다의 풍경과 어우러져 여행객들의 카메라 셔터를 쉬지 않게 만든다.
바닷가 작은 도시인 통영에서 어떻게 이렇게 많은 예술가가 태어날 수 있었을까. 그 실마리는 통영의 가장 중심부에 있는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 12공방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경상, 전라, 충청의 해군을 총지휘하는 삼도수군통제영이 자리 잡았던 통영은 조선시대 500여 척의 전함과 수군 3만 명 이상이 주둔한 최고의 군사도시였다. 이순신 장군이 군수품을 조달하는 ‘12공방’을 만들면서 8도에서 가장 뛰어난 장인들이 모여들었다. 무기뿐 아니라 옷, 모자, 가구, 부채 등을 직접 생산했고, 화폐를 발행하는 주전소까지 있었다. 나전칠기와 통영갓 등의 공예품은 임금님께도 진상되면서 조선의 명품으로 등극했다. 통제영에 방문하면 ‘세병관’ ‘운주당’과 함께 ‘12공방’과 공예품을 전시하는 매장을 볼 수 있다.
“이순신은 덕장이면서 예술가다. 임진왜란 당시 통영은 한촌(閑村)이었다. 해군본부(우수영)가 들어서면서 8도의 기술자(예술가)들이 모였다. 통영은 기후, 먹거리, 풍광이 아름다워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눌러앉아 소목장, 입자장, 선지장, 주석장이 되었다. 이들이 통영 예술의 토양이었다.”(박경리 ‘토지’ 완간 10주년 특별 대담)
통제영은 300년간 지속된 후 1895년 폐영됐지만, 많은 통영 사람들이 나전칠기, 소목, 화공 등 12공방의 일을 계속 가업으로 이어오면서 그들의 몸속에는 예술적 유전자가 형성됐다. 음악가 윤이상의 아버지도 유명한 소목장이었다.
화가 이중섭도 1952년 통영 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에서 학생들에게 데생을 가르치는 강사로 취직하면서 통영과 인연을 맺었다. 부산에서 부두노동자로 일하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던 이중섭은 1952년 통영 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 주임강사로 있던 유강렬(훗날 홍익대 산업미술대학원장)의 도움으로 통영에 왔다. 이중섭은 이곳에서 약 2년간 머무르며 ‘흰소’ ‘황소’ 등 자신의 대표작을 그렸다. 통영 시절 이중섭은 전혁림, 유강렬 등과 함께 호심다방과 성림다방에서 단체전과 개인전을 3차례 열어 작품을 팔았다. 통영 시절에 그린 그의 소 그림은 가장 힘이 넘친다.
이중섭이 머물렀던 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 건물은 ‘시드니 카페’라는 간판이 걸린 채 현재는 비어 있는데, 통영시에서 매입해 기념관으로 조성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중도 시인(윤이상기념관 팀장)은 “통영에서 가장 행복했던 이중섭은 새벽 4시부터 밤 10시까지 작업에 열중해 그가 머물렀던 도시 중 가장 많은 작품을 남겼다”며 “통영은 바다만 보고 있어도 시가 써지고, 그림이 그려지는 마법적인 곳”이라고 말했다.
● 매화 동백 절정, 바다에도 붉은 꽃이
통영대교 너머에 있는 미륵도는 수려한 산세와 숲, 바다가 어우러진 비대면 여행지로 각광받는 곳이다. 산양일주도로를 드라이브하거나 삼칭이해안길과 미래사 편백숲길을 걷는 사람도 많다. 달아공원 전망대에서 보는, 섬 사이로 떨어지는 일몰도 장관이다.
‘삼칭이해안길’은 통영 마리나리조트에서 영운리까지 이어지는 4km의 해변길이다. 해안침식을 막기 위해 쌓은 제방에서 바라보는 푸른 청보석 바다의 경치가 그만이다. 자동차가 다니지 않는 길이라 자전거를 타거나 걷기에 좋다.
이곳을 걷다가 양식 꽃멍게를 수확하는 작업장을 만났다. 푸른 바닷물 속에서 줄줄이 매달려 올라오는 멍게는 그야말로 붉은 꽃이었다.
미래사 편백숲길은 100년 가까이 되는 편백나무 숲이 5만 평이나 펼쳐져 있다. 편백나무는 다른 침엽수보다 세 배 이상의 피톤치드를 뿜어내 암 환자에게도 좋다고 한다. 숲길을 걷다 보면 하늘을 찌를 듯이 빽빽한 편백나무가 뿜어내는 향기가 온몸을 감싼다.
미륵도의 가로수는 동백이다. 도로 양쪽에 동백과 흰매화, 홍매화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가장 아름다운 동백은 이순신 장군을 모신 사당인 충렬사에서 만났다. 고즈넉한 사당 앞마당에 동백꽃은 나뭇가지에도, 나무 밑에도 뚝뚝 떨어져 붉게 피어 있었다. 충렬사 돌계단은 시인 백석이 사랑했던 통영의 한 소녀를 생각하며 울듯울듯한 마음으로 ‘¤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 앉아서/나는 이 저녁 울 듯 울 듯…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는 시를 썼던 곳이다.
통영은 ‘동피랑 벽화마을’이 조성된 후부터 젊은 예술가들이 몰리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로컬문화가 형성되고 있다. 통영의 바다 색채를 가장 잘 표현한 화가인 전혁림 화백의 그림을 볼 수 있는 봉수골 ‘전혁림 미술관’ 근처가 대표적이다.
미술관 바로 앞에 있는 ‘봄날의 책방’은 너무 예뻐 하루 종일 머무르고 싶은 서점이다. 2010년부터 통영에 내려가 로컬 콘텐츠를 책으로 만들어내는 ‘남해의 봄날’ 출판사 정은영 대표가 운영하고 있다. 골목길 옆에는 2016년부터 통영에 내려와 살고 있는 일러스트레이터 밥장이 운영하는 문화공간 카페 ‘내성적싸롱호심’도 있다.
통제영 근처의 ‘삼문당 커피컴퍼니’는 아버지가 50년 동안 운영하던 표구점을 아들이 새롭게 인테리어해서 만든 카페. 한 달에 한 번씩 지역 예술인들이 모여 인디밴드 공연과 인문학 강연, 남해안 별신굿 배우기 등이 펼쳐지는 이곳은 통영 로컬 힙스터들의 아지트다. 삼문당 윤덕현 대표(45)는 “박경리, 윤이상, 김춘수가 활동하던 시절처럼 젊은 예술가들이 다시 돌아오는 통영을 꿈꾼다”고 말했다.
●가볼 만한 곳=26일~다음 달 4일 열리는 통영국제음악제에서는 바이올린의 여제 정경화가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전곡 연주에 나선다. 퓨전 국악팝 ‘범 내려온다’로 화제를 일으킨 이날치밴드도 무대에 선다.
●맛집=통영의 싱싱한 제철 해산물을 먹기 위해서는 ‘통영 다찌집’을 찾아야 한다. 술을 시키면 안주는 멍게, 해삼, 생선회, 생선구이, 굴전 등 주인이 주는 대로 먹는다. 그날그날 시장에 나온 식재료에 따라 메뉴가 바뀌고 계절마다 제철 음식이 나온다.
통영 출신인 이중도 시인(52)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1993년 계간 ‘시와 시학’을 통해 문단에 등단했다. 통영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시를 쓰고 있다. 시집으로 ‘통영’ ‘섬사람’ ‘사라졌던 길들이 붕장어 떼 되어 몰려온다’ 등 5권의 시집을 낸 그는 통영의 살아 숨쉬는 자연을 배경으로 한 토속적 언어로 시를 쓴다. 윤이상 기념관에서 근무하고 있기도 하다.
―통영의 바다는 왜 잔잔하고 아름다운가.
“통영 앞 바다에는 570개의 크고 작은 섬이 있다. 그 중 유인도는 44개이고 나머지는 무인도다. 한산도 비진도 연화도 등이 파도를 막아주고 있는 내해는 정말 호수처럼 잔잔하다.”
―바닷가 항구도시 통영에서 근대 문화예술이 꽃피우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통영에는 세가지의 큰 뿌리가 있다. 가장 근원적인 것은 잔잔한 바다와 따뜻한 기후와 같은 자연 환경이다. 그것은 대체할 수 없는 부분이다. 두 번째는 300여년간의 통제영 전통에서 12공방이라는 장인들의 기술이 피어난 것이다. 통제사는 상당히 높은 계급이기 때문에 귀임할 때 상당히 많은 고급 진상품이 필요했다. 그런 목적으로 명품 나전칠기, 갓 등이 발전하게 됐다. 세 번째는 근현대의 문화예술 전통이다. 청마 유치환, 윤이상, 김춘수, 김상옥 같은 분들은 전부 일본 유학파다. 일본에서 근대의 신문물 세례를 받은 분들이다. 그리고 여기에 더불어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이 돈이다. 여수에서 돈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있었는데, 통영에 비교하면 게임이 안됐다. 바다에서 나오는 해산물이 엄청났기 때문에 금전적으로 풍족했다. 일제강점기 때 야마하 같은 악기점이 통영에 있었다. 야마하 피아노 악기점은 전국에서 서울하고 통영에만 있었다고 한다. 자연환경, 통제영 12공방 전통, 항구를 통한 근대 신문물의 세례, 재력이 합쳐진 결과라고 본다. 미술시장이 굉장히 어렵지만 통영에서는 요즘에도 그림이 팔린다. 통영에서는 새로 집을 이사갈 때는 그림을 사서 꾸미는 풍습이 있다. 전혁림 선생 그림이나 아는 화가의 그림 2000~3000만원 짜리 하나 사서 걸어두는 것이다.”
―화가 이중섭의 통영생활은 어떠했나.
“이중섭 선생은 통영에서 굉장히 행복했다. 통영에서 ‘흰소’와 ‘달과 까마귀’와 같은 대표적인 중요한 작품을 그렸다. 통영의 다방에서 4인 단체전 한번, 개인전 한번 전시회를 했는데 그림이 다 팔리고, 수금도 다 됐다. 통영은 6.25전쟁 피해를 받지 않은 도시라 살림살이가 괜찮았다. 그림도 팔리고 돈이 생기니까 일본에 있는 부인과 아이들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그가 부인에게 쓴 편지에 보면 ‘여보, 나는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밤 10시까지 그린다. 술도 마시지 않고 하루종일 그리다보니 그림이 산더미처럼 쌓여간다’는 구절이 있다. 가장 열정적으로 그린 시기였다. 2016년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이중섭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를 갔더니 그림을 작가가 머물렀던 장소에 따라 분류해서 원산관, 부산관, 서귀포관, 통영관이란 이름으로 전시실을 꾸몄더라. 그런데 이중섭의 전체 작품 중 80%가 통영에서 그린 그림이었다. 특히 유화는 통영이 절대적이었다. 왜냐하면 서귀포나 부산에서는 너무 생활고를 겪었기 때문에 유화 물감이나 그림 도구를 구하지 못해 작은 종이에 스케치한 것들이 많다. 이중섭 선생은 통영에서 청마 선생과도 교류했고, 김춘수 선생도 이중섭에 대한 연작시가 있다. 통영의 문인들과 많은 교감이 있었던 것 같다.”
―통영 이후의 이중섭의 생활은 어땠나.
“통영에서 2차례 전시회에서 그림을 다 팔고 돈까지 정산받았던 이중섭 선생은 자신감을 얻어 진주, 대구를 거쳐서 서울로 올라가면서 개인전을 했다. 런데 그림은 대부분 팔렸지만 실제로 수금이 안됐다. 서울에서는 일본 유학시절부터 절친했던 김환기 선생이 집도 없이 가난하게 살고 있는 이중섭 선생을 위해 발벗고 나서서 수금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그런데도 수금률이 5% 정도 밖에 안됐다고 한다. 그래서 절망했다. 통영에서 그린 소는 힘이 넘쳤다. 이중섭을 대표하는 소다. 그런데 서울에서 그린 소는 병색이 짙은 잿빛 소다. 소는 이중섭의 자화상이었다. 소를 따라가다 보면 이중섭 선생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
―통영의 자연이 예술에 미치는 영향은.
“통영은 시인과 화가의 도시다. 잔잔한 바다에 점점이 떠 있는 섬, 에머랄드빛 바다와 항구의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시가 써지고, 그림이 그려진다. 그런데 선이 굵은 대하소설이나 교향곡 같은 서사적 장르는 잘 나오지 않는다. 박경리 선생도 통영에만 계속 살았다면 ‘김약국의 딸들’ 같은 작품에 멈췄을 것이다. 그런데 박경리 선생은 쫓기듯 고향을 떠나 태백산맥 자락의 원주에 정착했다. 박 선생은 이후 수많은 작품에서 통영을 그렸지만, 50년간 한번도 통영을 찾지 않았다. 통영은 그에게 애증의 도시였다. 고향을 떠난 것은 가혹한 운명이었지만, 오히려 박 선생이 대하소설 ‘토지’를 쓸 수 있었던 배경이기도 하다. 이병주의 ‘지리산’, 조정래의 ‘태백산맥’, 박경리의 ‘토지’ 등 국내 대하소설이 대부분 태백산맥에서 살면서 쓴 소설이다. 통영에서는 중단편적인 소재만 있지, 대형서사가 나오기 힘들다. 대형 서사를 쓰려면 태백산맥으로 가야 한다. 윤이상 선생도 통영에서는 교가나 동요, 가곡 정도만 썼다. 독일 유학 후에 본격적인 대형서사를 갖춘 교향곡이 나온다. 통영은 서정의 고향이다. 시와 그림은 그냥 있어도 저절로 튀어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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