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대 연구원 논문 살펴보니
기생건물 창고에 옥적 숨겨놓고, 일제가 유물 옮기려 하자 반대 청원
경매로 나온 건물 구입, 철거 막기도
1909년 4월 경북 경주군(현 경주시) 현장 시찰에 나선 소네 아라스케(曾(니,이)荒助) 통감부(統監府·조선총독부의 전신) 부통감 일행은 나흘간 조선시대 관아(官衙)를 뒤졌다. 천장은 물론 마루까지 뜯어 샅샅이 살폈지만 원하던 물건을 찾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조선시대 관기(官妓)를 관리하던 건물의 땔감 창고에서 새까맣게 변색된 목재함 하나를 발견했다.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처럼 4중으로 된 함 안에는 이들이 그토록 찾아 헤맨 ‘신라 옥적(玉笛·옥으로 만든 피리)’이 들어 있었다.
신라 옥적은 신라 신문왕 때 만들어져 왕실 창고(천존고)에 보관됐으나 한동안 종적을 감췄다. 조선 후기인 17세기 경주 동경관에서 다시 발견됐다. 일각에선 이 피리가 삼국유사에 나라의 모든 근심과 걱정을 해결해준다는 전설의 피리,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소네가 찾아낸 신라 옥적은 이듬해인 1910년 경성으로 반출돼 이왕가박물관에 보관됐다. 이로부터 13년이 지난 1923년 옥적은 원래의 자리인 경주로 반환됐다. 어떻게 된 걸까.
아라키 준(荒木潤) 경북대 인문학술원 연구원은 최근 국립중앙박물관 고고학지에 발표한 논문(‘일제강점기 경주의 유물 반출·훼손과 조선인의 대응’)에서 구한말 조선인들이 일제에 맞서 문화재를 보호한 사례로 신라 옥적을 들었다. 그는 “국가 보물인 옥적이 기생건물 창고에서 발견된 건 석연치 않다”며 “당시 어느 조선인이 일본인들의 약탈을 막기 위해 일부러 격에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 옮겨둔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신라 옥적의 제자리 찾기에도 경주 주민들의 숨은 공이 컸다. 1921년 9월 경주 노서리 언덕에서 공사 도중 우연히 신라 왕릉인 금관총(金冠塚)이 발견됐다. 총독부는 금관총 출토 유물을 경성의 총독부박물관으로 옮기려고 했지만, 이에 반대하는 주민 여론에 밀려 포기했다. 당시 경주 유지인 조선인과 일본인 19명이 총독부에 제출한 청원서(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 따르면 이들은 금관총 출토품과 더불어 신라 옥적도 경주에 돌려놓을 것을 요구했다. 아라키 연구원에 따르면 이들은 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장을 지내는 등 총독부와 끈이 있던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를 이용하기도 했다. 모로가는 경주에서 온갖 고분을 도굴하고 유물을 빼돌린 자다. 그는 지역 유지로서 자신의 명성을 드높이기 위해 경주 주민들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여러 사람들이 애쓴 덕에 1923년 금관총 출토 유물과 신라 옥적이 경주박물관에 보관될 수 있었다.
경주 주민들의 문화재 사랑은 이후에도 꾸준히 이어졌다. 1937년 일제는 조선시대 경주 부윤(府尹)의 직무 공간이던 일승각(一勝閣)을 헐고 이 자리에 근대식 건물의 세무서를 짓는 방안을 추진했다. 앞서 1935년 경주 관아 중 하나인 월성아문이 헐린 상황이었다. 이에 경주 주민들은 ‘경주박물관 확장 운동’을 벌여 박물관에서 약 10m 떨어진 일승각을 박물관 경계 안으로 넣어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라키 연구원은 “일제강점기 경주박물관은 일본인이 운영했기에 총독부 동의를 얻기가 상대적으로 쉽다는 점을 이용하려 한 것”이라고 말했다.
재정난으로 인해 박물관 확장 운동은 실패했지만 일승각은 결국 보존될 수 있었다. 한 조선인이 경매로 나온 일승각을 사들여 경주읍성 남쪽으로 건물을 해체 이전했기 때문이다. 현재 이 건물은 불교 사찰로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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