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와도 앙상한 ‘나목’의 천국…박수근의 자취를 따라서[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3월 27일 11시 30분



DMZ에도 봄이 왔다. 금강산으로 가는 길목인 강원도 양구 해안면 ‘DMZ 펀치볼 둘레길’에는 아직도 곳곳에 눈과 얼음이 쌓여 있다. 그러나 얼음장 밑으로 녹아서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이 봄을 깨우는 ASMR(뇌를 자극해 심리적인 안정을 유도하는 자연음향)처럼 경쾌하게 숲 속에 울려퍼진다. 양구에 오면 10년이 젊어진다고 한다. 이제 막 눈이 녹고, 야생화가 피어나는 청정자연을 느끼며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DMZ 펀치볼 둘레길
6.25전쟁 당시 최대 격전지였던 ‘펀치볼(Punch Bowl)’은 여의도 면적의 6배의 광활한 대지다.펀치볼 둘레길의 ‘부부 소나무’ 전망대에 오르면 어떤 광각 카메라로도 한 번에 담기 어려운 광경에 가슴이 시원해진다. 가칠봉, 대암산, 도솔산, 대우산 등 해발 1000m 이상의 높은 산봉우리들이 왕관처럼 둘러싸고 있는 분지다. 6.25당시 외국의 종군기자가 “핑크빛 칵테일 화채 그릇처럼 생겼다”고 해서 ‘펀치볼’이란 애칭이 생겼다고 한다.




펀치볼 둘레길은 총 72.2km. 오유밭길, 만대벌판길, 먼멧재길, 평화의숲길 등 4개의 구간으로 이어진다. 해발 1200m의 대암산에는 국내 1호 람사르 습지이자,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습지인 ‘용늪’이 있다. 본격적으로 둘레길을 걷기 전에 몸을 푸는 준비운동을 마친 후 숲길체험지도사가 DMZ로 들어가는 철조망 문을 열었다. 둘레길 탐방로 양쪽엔 빨간 바탕에 노란글씨로 ‘지뢰’라고 씌여진 경고판이 선명하다. 탐방로를 벗어난 숲 속에는 아직도 지뢰가 곳곳에 묻혀 있기 때문에 이 길은 방문자센터에서 사전예약 후 전문해설사와 함께 걸어야 한다.



DMZ 생태탐방로는 동자꽃, 하늘말라리, 금강초롱, 앵초 등 희귀식물과 산양, 독수리, 하늘다람쥐 등 야생동물이 서식하고 있다. 해설사가 들려주는 야생화 설명과 6.25전쟁사 이야기에 빠져서 숲길을 걷다가 쪽동백나무와 단풍나무가 붙어서 자라는 ‘연리지(連理枝)’또는 ‘혼인목(婚姻木)’이라 부르는 나무를 만났다. 신기하게도 두 나무가 붙은 밑에서 어린 나무가 하나 자라고 있다. 박진용 숲길체험지도사는 “단풍나무와 쪽동백나무가 혼인했는데 전혀 다른 제3의 종의 나무가 태어났다”며 “이 나무 이름은 참회목”이라고 설명하자 한바탕 웃음이 터진다. 펀치볼 둘레길을 단체로 방문할 경우 계곡에서 먹는 ‘숲밥’이 인기다. 펀치볼 특산물인 시래기, 인삼뿐 아니라 곰취, 더덕, 두릅 등 10여개의 나물반찬이 나오는 뷔페다. 탐방 일주일 전 신청하면, 주민들이 시간을 맞춰 준비해준다.



●화가 박수근의 ‘나목(裸木)’

DMZ의 어느 소나무 밑에는 양구출신 국민화가 박수근(1914~1965)의 작품이 아직도 묻혀 있다는 이야기도 흥미를 끈다. 박수근은 아내의 친정인 북한 땅 금성에서 살다가 6.25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월남했다. 아내 김복순 씨는 월남 도중 남편의 작품 수십점을 갖고 올 수 없어 항아리에 담아 강원도 철원군 DMZ 한가운데 묻었다고 한다. 박수근의 ‘빨래터’는 2007년 당시 국내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인 45억2000만원에 낙찰됐다. 남북관계가 회복돼 언젠가 그림을 찾게 된다면 수백억원 대 이상의 가치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수근이 태어나 스물한 살까지 살았던 양구에는 화가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박수근은 나목(裸木)을 즐겨 그렸다.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한 ‘봄이 오다’부터 1950~60년대 ‘나무와 여인’ 시리즈까지 박수근이 그린 나무는 이파리 하나 없이 가지만 앙상하다. 봄이 왔건만 최북단 접경지대인 양구는 아직도 벌거벗은 나목의 천국이다.



지금도 양구교육지원청 뒷동산엔 ‘박수근 나무’라고 이름 붙여진 수령 300년 된 느릅나무가 남아 있다. 박 화백은 양구보통학교에 다니던 시절, 이 나무 아래서 친구들과 놀며 그림을 그렸다. 이 나무를 찾았을 때 박수근의 그림에서 튀어나온 듯 양구의 초등학생 형제가 나무 밑에서 놀고 있는 모습이 애틋했다.



앙구읍에 있는 박수근미술관은 지난 2002년 박수근 생가터에 건립됐다. 건축가 고 이종호가 설계한 미술관은 화강암으로 지어졌다. 박수근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돌처럼 투박하고 까칠까칠한 질감(마티에르)을 건물로 형상화한 것이다. ‘나무와 여인’ ‘빈 수레’ ‘굴비’ ‘두 남자’ 등 박수근의 유화 5점이 소장돼 있고, 건물 뒷편에는 박수근 묘소와 빨래터, 자작나무 숲도 있다. 유명한 빨래터 그림 밑에는 박수근이 아내에게 보냈다는 연애편지가 적혀 있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빨래터에 가서 당신을 자세히 보고 아내로 맞아들이기로 마음으로 결정했습니다.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입니다. 재산이라곤 붓과 파레트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만일 승낙하셔서 나와 결혼해 주신다면 물질적으로는 고생이 되겠으나 정신적으로는 당신을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해 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화가의 아내가 되어주시지 않겠습니까?”



미술관에서는 현재 박수근과 소설가 박완서(1931~2011)가 인연을 맺게 된 ‘나목’을 주제로 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두 사람은 1952년 당시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내에 있던 미8군 기념품 판매점 내 초상화부에서 함께 일한 바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화가의 작업실에서 우연히 본 그림을 ‘고목(枯木)’이라고 생각했으나 세월이 흘러서 황량해 보이기만 하던 그 그림이 시든 ‘고목’이 아니라 언젠가 싹을 틔울 봄날의 믿음 속에 의연하게 기다리는 ‘나목’이었음을 깨닫는다는 이야기다.

●양구백토의 600년 전통, 백자박물관
첩첩산중 최북단 양구가 조선백자 600년의 고향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곳에서 백자를 제작하는 질좋은 원료인 ‘양구 백토’가 생산됐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왕실 관요인 분원에 공급하는 양구 백토를 캐느라 백성들이 심한 노역에 시달려 상소를 올리는 일도 있을 정도였다. 금강산 월출봉 석함에서 발견된 이성계의 발원 사리구 백자발은 양구에서 생산된 대표적인 도자기로 유명하다.





방산에 있는 양구 백자박물관에 가면 양구 백자의 600년 역사를 감상할 수 있다. 조선백자의 마지막 꽃인 청화 백자는 물론 현대 백자도 전시하고 있다. 백자박물관 뒤편에 있는 수입천에는 높이 15m의 직연폭포의 물줄기가 떨어지는 직연폭포의 모습이 장관이다. 겨우내 얼었던 수입천이 녹아 파로호로 흘러드는 폭포 주위로 높이 약 20m 규모의 암벽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어 경관이 아름답다.




백자박물관에는 서울대 석박사출신 연구원이 양구백토를 연구하는 양구백자연구소도있다. 이 연구소 출신인 도예가 김덕호-이인화 부부는 아예 양구에 정착해서 백자를 만들고 있다. 그들의 작업실에 살고 있는 순백색의 고양이가 유리창 밑에 전시된 하얀 백자 사이를 어슬렁 거리면서도 작품을 하나도 건드리거나 깨뜨리지 않는 모습이 무척 신기했다.




●가볼만한 곳=양구 국토정중앙천문대 앞에 있는 ‘까미노 사이더리’는 모양이 예쁘지 않아서 버려지는 사과, 딸기 등 지역농산물을 이용해 주스, 식초 등의 가공식품을 만든다. 카페에서 친환경 농산물을 이용한 양구사과콤부차, 사과워터케피어 등의 음료와 애플케¤을 맛볼 수 있다. 철학자 김형석, 안병욱, 시인 이해인 수녀의 작품을 볼 수 있는 ‘양구 인문학박물관’, 파로호 호수 위에 조성된 한반도섬 둘레길도 찾아가볼 만하다. 두타연 계곡과 을지전망대, 대암산 ‘용늪’은 현재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영향으로 현재 공개를 하지 않는다.

●맛집=일교차가 심한 펀치볼에서는 고랭지 배추, 무 뿐 아니라 사과, 포도, 복숭아 등 당도가 높고 맛있는 과일이 생산된다. 양구의 특산물인 ‘시래기 정식’을 먹을 수 있는 식당은 ‘시래정’과 ‘시래원’이 있다. 토종닭, 고등어, 코다리에 시래기를 넣은 찜과 시래기 된장국이 입맛을 당긴다. ‘만대리 농가레스토랑’의 ‘두부 정식’에도 시래기 반찬이 일품이다.




글 사진 양구=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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