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문학 전공자들 3년 넘게 작업…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작품으로 구성
학회 “아직 영어로도 완간된 적 없어… 한국서 전집 번역된 건 이례적인 일”
움베르토 에코(1932∼2016)의 장편소설 ‘장미의 이름’에는 눈먼 수도사 호르헤가 나온다. 호르헤는 문학의 거장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를 흠모한 에코가 그에 대한 존경을 담아 만든 인물이다. 보르헤스는 유전병으로 말년에 시력을 잃었다.
아르헨티나 태생으로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선구자로 꼽히는 보르헤스는 제임스 조이스, 프란츠 카프카, 마르셀 프루스트와 함께 20세기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소설, 시, 평론 등 다양한 작품을 썼다.
보르헤스의 논픽션 전집 번역본이 한국에서 최근 완간됐다. 박정원 경희대 교수 등 국내 스페인문학 전공자 12명이 번역에 참여한 ‘보르헤스 논픽션 전집’(민음사)이 나온 것. 마지막 7권은 보르헤스가 종교와 문학에 대해 쓴 기고문과 강의집을 모은 ‘세계문학 강의’다.
“한국에서 보르헤스의 논픽션 전집이 먼저 번역돼 나온다니 놀랍다.”
대니얼 발더스턴 미국 피츠버그대 스페인어학과 교수는 박 교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보르헤스의 논픽션 전집이 아직 영어로도 번역되지 않은 상황에서 지리적 정서적으로 더 먼 한국에서 번역본이 먼저 완간됐기 때문이다. 발더스턴 교수는 보르헤스 문학을 연구하는 기관 중 가장 권위 있는 보르헤스센터를 책임지고 있다. 그는 “보르헤스센터가 매년 세 번 펴내는 잡지에 한국 번역자들이 글을 기고해 주기를 바란다”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잦아들면 센터 회원들이 한국을 직접 방문하고 싶다”고 했다.
앞서 민음사는 1994∼1997년 5권짜리 보르헤스 픽션 전집을 냈다. 하지만 국내에선 보르헤스에 ‘읽기 어려운 작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붙곤 했다. 그의 작품이 거짓과 진실, 환상과 현실을 뒤섞어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형식을 취하고 있어서다. 문학적으로는 매력적이지만 일반 독자가 읽기엔 까다롭다.
민음사는 보르헤스에 대한 독자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논픽션 전집을 내기로 했다. 이를 위해 2017년부터 국내 스페인문학 전문가들을 번역자로 섭외했다. 2018년 3월 처음으로 논픽션 전집 중 1∼3권을 펴냈다. 지난해 7월 출간한 ‘죽음의 모범’은 소설이지만 보르헤스가 부스토스 도메크라는 필명으로 쓴 작품으로 보르헤스의 기존 작품과 성격이 달라 논픽션 전집에 포함됐다. 7권짜리 논픽션 전집은 4364쪽에 달한다. 박여영 민음사 문학1팀 부장은 “민음사 편집자 7명이 동원될 정도로 심혈을 기울였다”고 말했다.
전집엔 동료 작가나 책에 대한 비평과 대학 강의집 등 다양한 주제와 형식의 산문도 담겼다. 논픽션 속성상 문학 작품보다 난해한 표현이 훨씬 적다. 보르헤스 입문서로 적합하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역자 중 한 명인 송병선 울산대 스페인중남미학과 교수는 “말년에 눈이 먼 보르헤스가 자신의 생각을 말하면 비서가 이를 받아 적은 글도 있다”며 “말을 글로 정리한 작품이라 표현이 비교적 명료해 일반인도 쉽게 읽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엄두를 내기 쉽지 않은 이른바 ‘벽돌 책’인데도 반응은 좋은 편이다. 초판이 모두 팔려 추가 인쇄에 들어간 낱권도 있다. 여러 번역자들이 참여한 만큼 글마다 다양한 문체를 감상할 수 있는 매력도 있다. 송 교수는 “국내 연구자들이 보르헤스의 논픽션을 번역하면서 연구의 질이 좋아졌다”며 “특히 작가 지망생과 문학 애호가에게 인기가 많은 작가인 만큼 한국 문학에 일정 부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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