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등’ ‘최고’만 고집말고 다같이 ‘최중’이 되면 안되나”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4월 27일 03시 00분


[한국배우 첫 아카데미 연기상]윤여정, 트로피보다 빛난 수상 소감들

배우 윤여정의 솔직하고 재치 있는 언변은 또다시 세계를 들었다 놨다. 유머로 아카데미를 폭소케 했으며, 진심 어린 고백으로 영화계를 감동시켰다.

윤여정은 25일(현지 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LA)의 유니언스테이션, 돌비극장서 열린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조연상 수상 소감에서 “많은 유럽 사람들이 제 이름을 ‘여영’이라거나 ‘유정’으로 부르는데 오늘은 모두 용서하겠다”며 좌중을 웃게 했다. 그는 이어 “제가 운이 조금 더 좋았을 뿐”이라며 같은 부문에 오른 후보들에 대한 존경을 표했다. 특히 ‘힐빌리의 노래’에 출연한 배우 글렌 클로스에 대해 “제가 어떻게 글렌 클로스를 이길 수 있겠나. 그의 영화를 정말 많이 봤다. 5명 후보가 모두 각자 영화에서의 수상자”라고 했다.

윤여정이 수상 소감에서 브래드 피트를 언급한 뒤 그를 당황케 하는 질문도 있었다. 시상식 백스테이지에서 한 외국 기자가 윤여정에게 ‘브래드 피트에게서 무슨 냄새가 났느냐(What did Brad Pitt smell like)’고 물은 것. 윤여정은 “나는 그의 냄새를 맡지 않았다. 나는 개가 아니다”라고 재치 있는 답을 날렸다. 일각에서는 ‘smell like’가 냄새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유명인을 만났을 때의 기분을 묻는 뜻으로 쓰인다는 해석도 있지만 공식 석상에서 부적절한 질문이었다는 비판이 나온다.

뒤이어 열린 한국 언론과의 간담회에서 윤여정은 보다 깊은 속내를 털어놨다. 배우로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때에 도리어 “최고의 순간이 싫다”고 했다. 그는 “이게 최고의 순간인지 잘 모르겠다. 아카데미가 전부는 아니다”라며 “굳이 너무 ‘1등’ ‘최고’만 고집하지 말고 다 같이 ‘최중’이 되면 안 되나?”라고 반문했다. 향후 계획에 대해 “계획 없다. 오스카상을 탔다고 해서 윤여정이 김여정이 되는 건 아니다”라며 웃었다.

그는 “주변에서 제가 상을 받을 것 같다고 했는데 솔직히 안 믿었다. 요행수도 안 믿는 사람이고 인생을 오래 살며 배반을 많이 당해 봤기 때문”이라고 털어놨다. 연기 철학에 대해선 “열등의식에서 시작됐다. 열심히 대사를 외워 남에게 피해를 안 주는 게 시작이었다. 먹고살기 위해 절실하게 연기했다. 대본이 저한테는 성경 같았다”고 회고했다.

윤여정은 영화 ‘미나리’가 세계적으로 호평받는 이유를 잘 쓴 대본과 제작진의 공으로 돌렸다. 그는 “부모가 희생하는 건 국제적으로 보편적인 이야기인 데다 모두가 진심으로 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이어 “정말 진심으로 얘기를 썼다. 그게 늙은 나를 건드렸다”고 덧붙였다. 리 아이작 정 감독에 대한 신뢰도 묻어났다. 그는 “우리 아들보다도 어린 감독인데 현장에서 누구도 업신여기지 않고 차분하게 여러 사람을 존중하며 일했다. 그에게 존경한다고 말했다”고 했다.

작품을 선정하는 기준에 대해 그는 “전에는 성과가 좋을 것 같은 작품을 했는데 환갑 넘어서부터 혼자 약속한 게 있다. 사람이 좋으면 한다는 것.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면 사치스럽게 사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제작자 브래드 피트에게 “다음 영화땐 돈 좀 더 써달라” 25일(현지 시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윤여정(왼쪽)이 여우조연상 트로피를 안고 시상자이자 ‘미나리’ 제작자인 브래드 피트와 함께했다. 로스앤젤레스=AP 뉴시스
제작자 브래드 피트에게 “다음 영화땐 돈 좀 더 써달라” 25일(현지 시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윤여정(왼쪽)이 여우조연상 트로피를 안고 시상자이자 ‘미나리’ 제작자인 브래드 피트와 함께했다. 로스앤젤레스=AP 뉴시스
말하기 어려운 돈 이야기도 거침없이 했다. 그는 “브래드 피트가 우리 영화의 제작자여서 다음에 영화 만들 때는 돈 좀 더 써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조금 더 쓰겠다고 하더라. 크게 쓰겠다고는 안 하고”라고 해 웃음을 자아냈다. 시상식에서는 브래드 피트에게 “드디어 만났네. (미국) 털사에서 우리가 (‘미나리’를) 촬영할 땐 어디 있었던 거예요?”라고 물어 폭소가 터졌다.

그는 수상 직전까지 2002 한일 월드컵 대표팀, 김연아 선수 등 운동선수의 심정에 이입했다고 했다. “아무 계획도 없이 영화를 찍으며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어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응원하니까 몸에 힘이 들어가 눈 실핏줄이 다 터졌어요. 상을 타서 성원에 보답할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하고 영광스러워요.”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 로스앤젤레스=유승진 특파원
#윤여정#최중#트로피#수상 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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