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 상을 저의 첫 번째 감독님, 김기영에게 바치고 싶습니다. 아주 천재적인 분이셨고 제 데뷔작을 함께했습니다. 살아계셨다면 아주 기뻐하셨을 거예요.”
25일(현지 시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한국 배우 최초로 여우조연상 트로피를 들어올린 배우 윤여정(74)의 수상 소감은 그의 스크린 데뷔작 ‘화녀’(1971년)를 연출한 고 김기영 감독을 향한 감사로 끝을 맺었다. ‘살아계셨다면 기뻐하셨을 것’이라는 말에선 집에 불이 나 갑작스레 세상을 등진 김 감독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났다. 그가 수상 소감에서 언급한 감독은 ‘미나리’를 함께한 리 아이작 정(한국명 정이삭) 감독과 김 감독, 단 두 명이다. 윤여정의 시작과 현재를 만든 감독인 셈. 김 감독은 당시 영화 경험이 없었던 신인 윤여정을 화녀와 ‘충녀’(1972년) 두 편에 주연으로 출연시켰다. 화녀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과 대종상영화제 신인상, 스페인 시제스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3관왕에 오른 윤여정에게는 지금도 ‘김기영의 페르소나’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27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사무실에서 만난 화녀의 제작자 정진우 감독(83)은 “어제 생방송으로 아카데미 시상식을 지켜봤다. 내가 상 받은 것보다 더 기뻤다”며 들뜬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그 역시 청룡영화상 감독상, 대종상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거장이지만 윤여정의 아카데미상 수상에 더 울컥했다는 것. 정 감독은 김 감독과 함께 ‘여(女)’(1968년)의 감독을 맡고, 김 감독이 연출한 화녀와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1978년)를 제작한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영화계 후배다. “어제 윤여정이 여우조연상을 타고 나서 김기영 감독 첫째 아들한테 전화를 걸었다. ‘소감으로 네 아버지 얘길 했다’고 하니 ‘저도 봤어요’ 하더라.”
정 감독은 ‘괴기스럽다’ ‘그로테스크하다’는 단어로 김 감독을 설명했다. 그 이유는 김 감독이 연출한 영화 한 편만 봐도 납득이 간다. ‘하녀’(1960년)에서 화녀, 충녀로 이어지는 ‘3부작’에는 수십 마리의 쥐가 계단을 뛰어다니고, 충녀에서는 알사탕 위에서 정사신이 펼쳐진다. “만나기만 하면 카뮈 얘길 하면서 실존주의를 논하고 ‘이 닦을 시간 있으면 시나리오를 한 줄 더 쓰겠다’고 할 정도로 영화에 미쳤던 사람”이었다. 그런 김 감독은 “윤여정과 죽이 참 잘 맞았다”고 회상했다.
“윤여정이 착해. 김기영이랑 한 번 작업하고 나면 ‘아이고’ 하고 전부 도망가는데 윤여정은 안 그랬어. 쉽게 말해 ‘열성파’끼리 만났으니까 궁합이 맞은 거야. 괴기스러운 감독과 괴기스러운 배우지. 제작부가 동네방네 쥐덫에 잡힌 쥐를 모아서 세트장에 쥐 50마리를 다 풀어놓고 연기를 시켜. 그런 사람 밑에서 도망가지 않은 것 자체가 대단한 거지.”
‘괴기스러운 감독’ 김기영 밑에서 꿋꿋이 영화 두 편을 찍은 윤여정은 시간이 흘러 “그땐 어려서 몰랐다. 기괴하기만 했다. 이후 다른 감독들과 작품을 했더니 좀 심심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정 감독은 “김기영한테 가면 배우가 되어서 나온다. 그 사람은 배우 만드는 기계다”라며 “완벽하게 자기가 생각하는 캐릭터로 만든다. 그게 될 때까지 무자비하게 훈련을 시킨다. 윤여정은 그 밑에서 두 편을 버틴 거다”라고 했다.
윤여정이 화녀로 받은 첫 국제영화상인 시제스 영화제 여우주연상은 정 감독이 화녀의 남자 주인공 남궁원과 영화제에 참석해 받아왔다. “그땐 비행기 티켓도 자비로 끊어야 했기에 윤여정을 못 데려간 게 아직도 미안하다”는 그는 “직접 가진 못했지만 실력만은 정정당당하게 인정받았다”고 했다.
당시만 해도 유럽의 심사위원들이 한국의 존재도 잘 몰랐던 때라 ‘로비’가 중요했다는 것. 영화를 잘봐 주십사 심사위원들에게 선물할 와인 13병을 챙겨갔지만 현지에서 만난 사람들과 다 마셔버리는 바람에 전달하진 못했다. “한국이 어딘지도 모르던 때에 아무 로비도 없이 윤여정은 순수하게 자기 실력으로 여우주연상을 탄 거야.”
정 감독은 미나리로 세계적 주목을 받고 있는 윤여정의 신인 시절을 관객에게 다시 선보이고자 화녀 재개봉을 추진했다. 다음 달 1일 CGV 시그니처K관에서 상영을 시작한다. “아카데미 수상은 지금 영화인들이 잘한 것도 있지만 김기영 감독과 윤여정 같은 과거 감독과 배우들이 쌓아온 것들의 결과물이기도 해. 그 덕에 50년 만에 화녀도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되니 기쁠 따름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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