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늙지 않는 건 축복일까. 적어도 사랑을 하기에는 불멸만큼 나쁜 게 없을 것 같다. 고작해야 수십 년을 살다가 사라져버리는 인간과 사랑을 나누려면 영생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다. 이 소설은 저주 받은 두 존재에 대한 이야기다.
2009년 ‘위저드 베이커리’로 등단한 후 탄탄한 독자층을 다져온 구병모의 여섯 번째 장편소설이 출간됐다. 마법의 빵이 만들어지는 베이커리를 배경으로 인간의 욕망을 들춰낸 ‘위저드 베이커리’를 통해 그의 청소년 소설은 성장소설이라는 공식을 파괴하며, 정밀한 서사와 판타지 요소를 두루 갖췄다는 평을 받았다.
구병모는 이후 피그말리온 아이들(2012년), 버드 스트라이크(2019년)를 통해 자신만의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발전시키면서도 문체를 시니컬하게 다듬어왔다. 이번 신작에서는 한층 더 깊고 짙어진 구병모의 스타일을 감상할 수 있다. 몽환적 분위기에 차가운 문장들을 수놓으면 외로움이 그려진다는 걸 그의 소설이 아니라면 알기 어려웠을 테다.
소설은 동화 ‘구두장이 요정’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발가벗은 요정들이 가난하지만 정직하고 성실한 구두장이를 도운 끝에 구두장이는 부를, 요정들은 옷을 얻게 되는 이야기다. 행복한 결말을 상징하는 요정의 옷에서 작가는 영생을 누리는 존재가 인간의 외피를 입는 상상을 했다. 행복이 저주로 바뀌는 전복의 지점에서 구병모식 소설이 시작된다.
한 사람은 기꺼이 사랑에 빠지며 예견된 불행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지만 다른 한 사람은 누구와도 오래 사랑하지 않는다. 이야기는 사랑을 포기한 ‘안’이 자신과 똑같은 불멸의 존재인 ‘미아’로부터 그의 연인 ‘유진’을 소개받으며 시작된다. 안과 미아는 과거 함께 신발을 만들며 지낸 사이다.
안은 결코 사랑을 모르지 않는다. 오래전 미아를 사랑했지만 혼자의 삶을 원했던 미아를 떠나보낸 적이 있다. 억겁의 시간이 지나 다시 만난 미아가 유진과 함께 미래를 꿈꾸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안은 혼란에 빠진다. 유진의 등장을 계기로 안은 사랑에 빠지려고 하면 부러 관계를 끊곤 했던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게 된다.
소설은 단순하지 않다. 흔한 사랑찬가처럼 ‘사랑은 어떤 시련도 극복하고 쟁취해야 할 가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중반부에 등장하는 안이 40년 전 사랑했던 여자의 아들은 이야기를 보다 다층적으로 확장시키는 역할을 한다. 시인이자 안의 구두공방 수강생인 그는 조산된 아기의 신발을 끝끝내 완성해낸다. 조산기가 있다는 것을, 아기가 떠날 것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신발을 만드는 모습은 마치 유진을 사랑하는 미아의 모습과 닮았다. 하지만 “더는 쓸데없어진 것이라는 이유로 아름답게 완성시키면 안 되나?”라는 시인의 질문과 그가 완성해 낸 멀끔한 신발은 미처 가닿지 못한 사랑 역시 충분히 아름답다는 걸 시사하는 것 같다.
‘위저드 베이커리’와 비슷한 분위기를 기대하는 독자라면 실망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적게나마 스며 있던 경쾌함을 이번 소설에선 찾아볼 수 없다. 전작 ‘아가미’(2010년)와 같이 흡입력이 강한 소설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절반 이상의 문장이 현재형으로, 소설 전체가 마치 안의 독백처럼 읽힌다. 하지만 소설 속 인물, 특히 안의 내면을 가만가만 쫓아가는 재미가 꽤 크다. ‘위저드 베이커리’를 읽느라 밤잠을 설쳤던 어린이들도 이제는 삶의 유한함과 사랑을 이해할 수 있는 어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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