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 배우상 후보에 일곱 번 오르고 영화 ‘블루 재스민’(2013년)과 ‘에비에이터’(2004년)로 각각 여우주연상과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아카데미 단골. ‘커피와 담배’(2003년)에서 1인 2역, ‘매니페스토’(2016년)에서는 1인 12역까지 소화한 ‘1인 다역’의 귀재. 밥 딜런의 생애를 그린 영화 ‘아임 낫 데어’(2007년), 연극 ‘리차드 2세’에서 남자 역할을 맡으며 성별도 자유롭게 넘나드는 연기 천재. 여성 ‘투 톱’ 주연에 동성애 소재라는 장벽으로 10년 넘게 제작되지 못했던 영화 ‘캐롤’(2015년)에 주연으로 출연한 것은 물론 직접 제작자로 나선 뚝심. 이 모든 수식어를 담는 그는 케이트 블란쳇(52)이다. 그 이름만으로도 카리스마를 내뿜는다.
1997년 ‘파라다이스 로드’로 데뷔한 그는 24년간 영화와 연극을 오가며 독보적인 배우가 됐다. 하지만 그를 영화 제작자로 아는 이는 드물다. 영화감독인 남편 앤드루 업턴과 함께 영화 제작사 ‘더티 필름’을 세우고 캐롤을 제작한 블란쳇은 두 번째 영화로 그리스 감독 크리스토스 니코우가 연출한 ‘애플’을 택했다. 애플의 이달 한국 개봉을 앞두고 그를 서면으로 인터뷰했다.
애플은 기억상실증이 유행병이 된 세상이 배경이다. 이 병에 걸린 주인공 알리스는 자신의 이름도, 집 주소도 잊어버렸다. 병원은 그에게 새로운 경험을 통해 기억을 만들어내는 ‘인생 배우기’ 프로그램을 제안한다. 알리스는 영화 보기, 자전거 타기와 같은 일상부터 여성과 잠자리를 갖는 것까지 인간의 보편적인 경험을 쌓으며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간다. 지난해 베니스 국제영화제에 심사위원장으로 참여해 시사회에서 애플을 본 블란쳇은 영화의 독특한 분위기에 매료됐다고 했다.
“애플을 영화제에서 보게 된 건 엄청난 행운이었어요. 이상하고 묘한 매력이 있으면서도 현실 세계에서 너무나 있을 법한 이야기였어요. 붕 떠 있는 듯하면서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죠. 이후 크리스토스와 미팅을 했고, 만난 직후부터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고 웃었어요.”
블란쳇은 총괄 프로듀서로 참여해 영화의 배급을 담당했다. 영화가 거래되는 필름마켓에서 해외 판매에 힘을 실어준 것.
“영화 제작에 참여하는 방법은 다양해요. 감독이 무엇을 필요로 하느냐에 따라서요. 크리스토스와 함께 일하고 싶다는 점은 매우 명확했기에 베니스 영화제 이후 그가 ‘영화가 다양한 시장에 진입하는 데 도움을 달라’고 했을 때 제 대답은 당연히 ‘예스’였죠. 특히 올해는 (팬데믹으로) 영화가 해외 시장에 판매되는 게 어려웠기에 영화가 숨쉴 공간을 마련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애플은 정체불명의 원인으로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기억상실을 겪게 된다는 점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세계를 덮친 현실과 닮았다.
“영화 제작에 6년이 걸렸기에 유행병이라는 개념은 팬데믹이 발생하기 훨씬 전 크리스토스의 머릿속에 있었어요. 물론 현재 사람들이 코로나19로 힘든 시간을 지나오고 있기에 관객들은 영화를 팬데믹이라는 렌즈를 통해 감상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다만 그건 우연의 일치예요. 이 영화는 정체성과 고독, 그리고 익숙한 것의 상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점은 시대를 막론하고 울림을 줄 거예요.”
그는 더티 필름이 곧 선보일 흥미로운 작품이 많다며 한국 감독들과의 협업도 고대하고 있다고 했다.
“더티 필름은 박찬욱 감독과 오랜 기간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요. 그에겐 자신만의 독특한 관점이 있고 이야기와 캐릭터, 관객을 바라보는 놀라운 방식이 있어요. 영화에 대한 제 관심은 다방면에 걸쳐 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훌륭하고 유일무이한 이야기를 가진 좋은 사람들과 협업하는 겁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