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한 해도 저물어가는 11월 6일자 동아일보 2면에 ‘여지없는 조선인 공업’이란 제목의 머리기사가 실렸습니다. 조선인 공업이 어쩔 도리가 없다는 이 제목의 뜻은 이어지는 소제목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무엇에나 구축당하는 조선인, 점점 쇠퇴하여 가는 우리 사업.’ 이 기사는 당시 한반도의 최대도시인 경성의 산업계 현주소를 점검하는 총 6회 연재의 첫 회분이었습니다. 지금의 서울시인 그때 경성부의 통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방법으로 경성 산업계의 실태를 알렸죠.
경성의 산업계를 크게 △기계‧기구 △포백 △화학 △식량 △기타의 5개 분야로 구분하고 다시 소분야로 나누었습니다. 여기서 포백은 베와 비단의 뜻으로 섬유업에 해당됩니다. 소분야별로 20만여 명의 경성부민들이 몇 명이나 일하고 자본금과 연간 생산액은 얼마인지 수치로 나타냈습니다. 경성부민과 상대가 되는 사람들은? 네, 일본인들입니다. 그러니까 각 분야에서 경성부민과 일본인의 공장 수와 자본금, 연간 생산액을 비교했죠.
기계‧기구의 소분야 중 하나인 차량‧선박을 볼까요? 공장 수는 일본인 7곳, 경성부민 3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자본금은 일본인 255만6200원, 경성부민 5000원이고 연간 생산액은 일본인 331만1378원, 경성부민 3만8000원이었죠. 점유율로 하면 일본인이 자본금과 연간 생산액의 거의 100%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경성부민 소유 공장에서 1년에 인력거 20대와 화차 200여대를 만들었지만 경성에서 연간 제조되는 차량 총대수의 11%에 불과했죠.
금속제품 공장 수는 일본인 66곳, 경성부민 35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자본금과 연간 생산에서 경성부민은 16%와 13%를 차지하는데 그쳤죠. 경성부민의 공장이 영세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품목으로 봐도 일본인이 전동기, 판금세공, 각종 기계 등을 제조한 반면 경성부민은 놋그릇, 농기구, 자전거 따위를 만들었습니다. 게다가 경성부민의 공장은 전기 동력이 아니라 대부분 수공업 방식이었죠.
경성부민이 강세를 보일만한 소비산업인 과자에서도 일본인이 연간 생산액의 90%를 차지했고 청량음료는 공장 3곳을 모두 일본인이 소유했습니다. 이런데도 경성부민들은 ‘목마르다고 음료수를 벌컥벌컥 마시고 달다고 과자를 사먹을 줄 아니 장차 어찌한단 말인가’라고 기자는 한탄하죠. 술도 소주나 약주는 제쳐두고 정종이나 위스키를 찾으니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경성부민이 그나마 연간 생산액에서 우위를 보이는 소분야는 직물과 견(繭‧누에고치)제품, 정곡업, 피혁, 고무, 동식물성 기름, 모자뿐이었죠. 하지만 피혁과 고무는 일본인이 게다를 많이 신느라 구두나 고무신을 별로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문제는 동포를 빈곤의 늪에 빠지게 하는 차별적인 산업구조를 개선할 방법이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미 조선총독부가 1921년 열었던 산업조사위원회의 결론이 ‘조선을 식량과 원료의 공급지와 상품 소비시장, 일본 자본의 진출지로 개발한다’였으니까요(2020년 8월 1일자 ‘“일본과 경제 전쟁서 지면 민족참화”…이기려면’ 참조). 동아일보가 같은 해 10월 7일자 사설에서 ‘어떻게 공업을 발전하게 하며 어떻게 그것을 장려할 도리가 있느냐’라고 답답해 한 배경이기도 합니다. 1923년 기대 속에 깃발을 올렸던 물산장려운동은 반짝 효과에 그쳤죠.
동아일보는 이 해 12월 29일자 사설 ‘이 현상을 어떻게 구제할까’에서 일본과 조선 사이에 관세를 부활하고 일본인 이민정책을 중단하라고 촉구합니다. 이 두 가지만 이행돼도 한결 숨통이 트일 테니까요. 그리고 일제 지배 아래서 대규모 기계공업을 일으킬 방법은 없지만 소규모 공업이라도 촉진하라고 총독부에 요구합니다. 동포들에게는 근면, 절약, 상호부조를 호소했고요. 슬프지만 아마도 이것이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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