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꿈에 자주 보이던 길이 하나 있다. 서울 시내 왕복 6차로 도로가 지나는 그 길은 지극히 평범했다. 차량 소음, 후면 도로와 연접한 주택가, 적당히 떨어져 있는 재래시장까지. 무엇 하나 특별할 것 없는 장소다. 그러나 20대 중후반 내내 이곳을 차마 걷지 못했다. ‘그녀’를 바래다주려 매일같이 오가던 길이어서다. ‘이 거리는 널 기다린다’는 성시경 노래의 가사가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던 시절의 얘기다.
이 책은 노르웨이 저널리스트인 저자가 어린 시절 다녔던 오솔길부터 각국의 유명한 장거리 도보여행길까지 다양한 장소를 걸으며 느낀 감상을 적은 것이다. 어느 날 뇌전증 진단을 받은 저자는 운전면허를 반납한 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무한 걷기’에 나선다. 그는 노르웨이 하르당에르 고원을 가로지르는 옛 산길을 걷고, 오슬로 근처 노르마르카 숲을 지도와 나침반도 없이 오직 햇빛에만 의존해 걸으며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는 모험을 감행한다. 그렇다고 단순한 여행기는 아니다. 그의 홀로 걷기는 빠른 속도의 삶에서 놓친 일상을 재발견하는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숱한 길을 걸었건만 그에게 모든 길에 대한 평가 기준은 오직 하나다. 바로 어린 시절 부모, 형제들과 주말마다 지겹게 걷던 노르웨이 시골 오두막의 오솔길이다. 마치 통과의례처럼 그의 부모는 오두막에서 자유롭게 퍼지기 전 반드시 아이들과 뒷길을 산책했다. 이 길에서 맞은 서늘한 공기하며 뺨을 스치는 빗방울,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풀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고무장화가 풀밭에 푹 빠지는 느낌 등은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생생하단다. 이 책 부제 ‘시간과 자연을 걷는 일에 대하여’와 딱 어울리는 대목이다.
저자는 “여태껏 내 인생의 모든 길을 우리 오두막 뒤로 난 그 작은 오솔길을 중심으로 평가해 왔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고 썼다. ‘길은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지만, 동시에 과거의 우리 자신에게 되돌아가게 하기도 한다.’(작가 제프 니컬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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