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케이퍼 무비는 최동훈 감독의 ‘도둑들’(2012)이 완성했다. 이후에 나오는 비슷한 류의 영화나 드라마는 크든 적든 ‘도둑들’의 영향을 받았고, 그렇게 나온 비슷한 작품들이 반복해온 어떤 습관들이 클리셰를 이뤘다. 예비 관객들이 케이퍼 무비의 형식을 띤 ‘파이프라인’(감독 유하)의 개봉을 앞두고 영화 속에서 “선수 입장” 같은 대사가 나올 것 같다는 농담을 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다행히도 ‘파이프라인’에 “선수 입장” 같은 대사는 없다. 그럼에도 영화는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말죽거리 잔혹사’와 ‘비열한 거리’ ‘쌍화점’ 등을 만든 유하 감독은 해보지 않았던 장르와 ‘도유’라는 새로운 소재에 도전했지만, 포부만큼의 소득을 얻지는 못했다. 유하 감독의 전작들은 세련됐다고 할 수는 없어도 나름의 고유성을 갖고 있었으나 이번 작품은 작위성에 갇혀 그마저도 잃어버린 느낌이다.
영화는 업계 최고라 불리는 핀돌이(서인국 분)가 대한민국 굴지의 정유 회사 후계자 건우(이수혁 분)으로부터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을 받으면서 시작한다. 핀돌이는 드릴로 송유관에 구멍을 뚫어 기름을 빼돌리는 천공 기술자다. 사채업자들에 큰 빚을 진 건우는 핀돌이를 중심으로 팀을 짜 수천억의 기름을 빼돌리고자 마음을 먹는다. 핀돌이는 어려운 작업이라며 거절하지만, 어머니의 사진까지 들고 와 협박하는 건우에게 결국 원하는대로 일을 해주겠다 약속한다.
이어 조선소에서 실력을 쌓은 용접공 접새(음문석 분)와 건축과 30년 경력 전직 공무원 나과장(유승목 분), 괴력을 소유한 굴착 담당 큰삽(태항호 분), 감시 업무를 맡은 카운터(배다빈 분)까지 다섯 명이 한 팀이 돼 어느 작은 관광 호텔에 모이고, 호텔 지하에서 도유 작업이 시작된다. 하지만 일은 쉽지 않다. 땅굴을 파서 송유관에 접근하는 것이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접새가 시도때도 없이 선금을 갖고 도망을 치려는 통에 물주인 건우로부터 큰 압박을 받게 된다. 그뿐 아니라 나과장은 아픈 아내의 수술비를 내기 위해 몰래 호텔을 빠져나갔다 오겠다며 리더인 핀돌이에게 어려운 부탁까지 해온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맹점은 이들이 하고자 하는 도유 작업이 거창한 과정을 요구하지 않는, 간단한 작업이라는 데 있다. 잘 만든 케이퍼무비라면 어려운 일을 감쪽같이 성공시키기 위해 주인공들이 여러 트릭을 써 관객들을 깜짝 놀래키는 일이 가장 큰 재미요소다. 하지만 도유는 지하에서 송유관에 접근해 구멍을 뚫기만 하면 되는 일이라 많은 과정이 필요하지 않다. 단순한 전개를 탈피하기 위해 유하 감독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접새, 제멋대로인 건우의 캐릭터, 이들을 의심하는 경찰 만식(배유람 분) 존재 등을 통해 범죄 영화로서의 스릴감을 형성해 보려고 했으나 작위적이기만 하다. 인물들의 행동으로 사건을 만들어 내기 전에 개연성 있는 설정이 탄탄하게 뒷받침 돼야 보는 이들의 몰입을 끌어낼 수 있는 법이다.
인물들의 캐릭터에는 주목할만한 점이 하나 있다. 모든 캐릭터가 종국에 가서는 ‘찌질함’을 뿜어낸다는 점이다. ‘파이프라인’ 속 인물들은 완벽하지 않다. 완벽해 보이기만 했던 주인공 핀돌이도 건우의 반격에 어찌할 바 몰라 끝까지 고군분투하는데 여기에 묘한 매력이 있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발산되는 뒷부분의 블랙 유머가 영화 전반에 발휘됐다면 작품 전체의 재미가 달라졌을 것이다. 러닝타임 108분. 26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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