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달 기사 소재로 시집 낸 주창윤 “우리 모두 속도의 세계에 갇혀”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5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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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째 시집 ‘안드로메다로…’
일상의 언어로 시대상 쉽게 전달
아파트 계단 쿠팡맨 마주친 시인
“7과 1/2층은 어디에 있나요?… 깊은 터널이 나오죠”

시집 ‘안드로메다로 가는 배민 라이더’를 펴낸 주창윤 시인. 그는 “속도의 세계에서 우리 모두 천천히 가면 어떻겠냐는 말을 독자들에게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주창윤 시인 제공
시집 ‘안드로메다로 가는 배민 라이더’를 펴낸 주창윤 시인. 그는 “속도의 세계에서 우리 모두 천천히 가면 어떻겠냐는 말을 독자들에게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주창윤 시인 제공
‘머나먼 길이다 청량리역에서 안드로메다까지,/별의 여왕에게 영원히 배고프지 않는 마법의 라면을 배달하러/페가수스 별자리를 향해 일만 광년의 속도로 질주한다.’

지난해 여름 주창윤 시인(58)은 배달 애플리케이션으로 음식을 자주 시켜먹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더운 날씨 탓에 식당에 가기가 꺼려져서다. 두꺼운 옷을 입고 헬멧을 쓴 채 땀에 절어 음식을 배달하는 기사를 볼 때마다 유심히 관찰했다. 그러곤 상상의 나래를 폈다. 그들이 출발한 곳은 지구지만 도착지는 머나먼 우주 아닐까. 허기질 때마다 음식을 시켜먹을 수 있는 소비자는 영원히 배부른 존재 아닐까. 그가 18일 펴낸 시집 ‘안드로메다로 가는 배민 라이더’(한국문연·사진)는 이렇게 탄생했다.

주 시인은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나는 이기적이고 이중적인 사람”이라고 말했다. 소비자로서는 빠른 배달을 원하면서, 배달을 시키지 않을 땐 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이중의 심리를 가졌다는 것. 그는 “배고플 때 음식이 빨리 오지 않으면 짜증이 나지 않나. 반면 배부를 땐 도로에서 오토바이를 탄 기사들이 과속하는 걸 보면 화가 난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모든 시는 일상을 세밀히 관찰해 썼다. 현미경처럼 한 부분을 집중해서 보면 시가 나온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여름 퀵서비스 기사가 넘어지는 모습을 보고 쓴 시 ‘추석을 배달하는 퀵서비스 맨’은 건조한 묘사가 인상적이다. ‘사거리에서 넘어진 오토바이/바퀴는 계속해서 헛돌고/쓰러진 퀵서비스 맨은 일어나지 못한다.’ 그는 “많은 이들이 도로에서 나는 사고를 한번씩 보지 않나. 이를 본 후 머릿속에 장면을 남기고 옮겨 적었다”고 했다.

그는 1986년 등단해 1998년 두 번째 시집을 낸 이후 23년간 시집을 내지 않은 채 학자로 살았다. 서울여대 언론영상학부 교수로 문화 흐름을 주로 연구했다. 그는 “새로운 문화 트렌드를 연구하다 보니 배달 문제처럼 시대의 예민한 부분을 시로 쓰고 싶었다”고 출간 이유를 밝혔다. 일상적 언어를 즐겨 쓰는 이유에 대해 시인은 시대상을 쉽게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요즘 시는 너무 어렵다. 시대를 읽어내지 못한다”며 “간결한 언어로 세상을 다루겠다는 창작 원칙에 따라 작품을 썼다”고 말했다.

현실에 대한 관찰은 종종 시적 허구로 이어진다. 주 시인은 지난해 여름 출근길 아파트 계단에서 쿠팡맨과 마주친 뒤 ‘쿠팡맨의 과로사’를 썼다. ‘7과 1/2층은 어디에 있나요?/엘리베이터를 7과 8층 사이에 세워 두고/그 틈을 자세히 보면/깊은 터널이 나오죠.’

“어쩌면 쿠팡맨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목적지를 헤매는 존재이지 않을까요. 배달기사들처럼 우리 모두 속도의 세계에 갇혀 있는 건 아닐까요.”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배달기사#시집#주창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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