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의 외식에서 테이블 위에 놓인 향긋한 와인 향을 맡지 못한다면. 지속되는 환각 탓에 모르는 이가 불쑥 나타날까 두려워 화장실 문고리조차 마음 편히 열지 못한다면. 분명 눈앞에 휴대전화가 있는데도 등 뒤에서 벨소리가 들린다면 어떨까. ‘희한한 일에 이골이 난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저자의 일상은 환각과 환시, 환청, 환후로 점철돼 있다. 그는 존재하지 않는 걸 느끼는 증상과 같은 인지장애에 시달리며 살고 있다.
삶의 질을 현저히 저하시키는 증상을 겪은 저자의 병명은 ‘레비소체 인지저하증’. 뇌 신경세포에 단백질 덩어리인 레비소체가 쌓이면서 발병하는 질환으로 일명 치매라고도 불린다. 저자는 기억력 저하, 시공간 인지 능력 저하, 언어력 감퇴 등 다양한 인지기능 장애가 동반된 이 병을 50세에 진단받았다.
그는 눈앞에 보이는 오렌지만 한 크기의 거미가 진짜인지, 귀에 들리는 멜로디가 실제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인지 등 자신의 오감으로 받아들이는 감각이 실재하는지 의심해야 하는 고통을 담담히 기록했다. 자신이 맞닥뜨린 고통의 순간들을 저자는 솔직히 털어놓는다. “이 세상에서 뭐가 진짜고 뭐가 가짜인지 구별할 수 없다. 나 자신을, 내가 보는 세계를 더 이상 믿을 수가 없다.” 병환이 심해진 그는 결국 직장을 그만뒀다. 그러곤 자신은 어떤 방식으로도 쓸모없는 사람이 됐다는 처절한 자기혐오에 휩싸인다.
어느 날 그는 NHK 생활정보 프로그램 디렉터와의 인터뷰를 통해 레비소체 인지저하증 환자로서의 경험이 누군가에게 귀중한 정보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후 저자는 실명을 공개하고 자신의 질병을 적극적으로 알리는 데 나선다. 집필과 강연은 물론이고 인지저하증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한 가상현실(VR) 콘텐츠를 만들었다. 고통의 시간을 지나 단단한 내면을 갖게 되기까지 각자가 처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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