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최초 신춘문예에서 동요만 1등을 선정한 이유는?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6월 4일 11시 40분


1925년 01월 02일


플래시백

상금이나 상품을 내걸고 맞춤한 대상을 선정하는 일이 자주 있습니다. 현상모집이죠. 문학 분야의 현상모집은 신춘문예를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만합니다. 물론 신춘문예라고 하면 신문사가 주최하는 신인작가 등용문이라고 널리 이해되고 있죠. 지금이야 현상공모 문학행사가 워낙 많으니까 다소 시들해졌다고 해도 해마다 신문사들의 신춘문예 공고가 실리면 문청(문학청년)들의 가슴앓이가 시작된다고들 했습니다. 그렇다면 신춘문예의 원형이 언제 시작됐는지 알고 계시나요?

‘신춘문예’와 ‘신진작가’의 두 가지 요소가 모두 들어가는 현재와 같은 신춘문예 모집은 1925년 1월 2일자 동아일보 사고가 처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춘문예’ 구절이 들어간 최초의 현상모집 알림은 이미 1919년 12월 2일자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실렸습니다. 하지만 이때 매일신보는 신진작가를 발굴한다는 목적을 또렷하게 내세우진 않았죠. 독자들의 관심을 높이기 위한 의도가 더 컸다고 봐야 할 겁니다. 그리고 이후 매일신보는 ‘신춘문예’보다 ‘신년문예’라는 표현을 더 많이 사용했습니다.

동아일보 1925년 1월 2, 8, 16, 19, 26일자에 실린 신춘문예 모집 알림.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게재된 1월 26일자 알림에는 응모자는 반드시 겉봉투에 '현상'이라는 글자를 빨간색으로 써달라는 주의가 추가됐다.
동아일보 1925년 1월 2, 8, 16, 19, 26일자에 실린 신춘문예 모집 알림.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게재된 1월 26일자 알림에는 응모자는 반드시 겉봉투에 '현상'이라는 글자를 빨간색으로 써달라는 주의가 추가됐다.

1925년 동아일보가 신춘문예 모집을 시작했고 2년 뒤인 1927년에 조선일보가 신춘문예 공모를 시행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신춘문예와 매일신보의 신년문예가 신문사 문학 현상모집의 큰 틀로 자리 잡은 셈입니다. 동아일보 첫 신춘문예 공고는 문예 부인 소년의 3개 부문으로 나뉘었습니다. 문예는 단편소설과 신시, 부인은 가정소설, 소년은 동화극과 가극, 동요로 세분되었죠. 크게는 3개 부문, 작게는 6개 부문에 걸쳐 신인작가들의 신선하고 패기 넘치는 투고를 기대했습니다.

1925년 이전에도 상금이나 상품을 내건 현상공모가 적지 않게 있었다. 1924년 12월 17, 18, 23일자에 실린 '2000원 대현상' 소설과 논문 공모 알림.
1925년 이전에도 상금이나 상품을 내건 현상공모가 적지 않게 있었다. 1924년 12월 17, 18, 23일자에 실린 '2000원 대현상' 소설과 논문 공모 알림.

동아일보는 1925년 1월에 신춘문예 공고를 5차례나 게재했습니다. 그만큼 의지가 실렸다고 봐야겠죠. 특이하게도 공고 안에 편집국장 홍명희의 이름을 넣었습니다. 홍명희가 편집국장 겸 학예부장으로 힘과 정성을 다하겠다고 했죠. 아시다시피 홍명희는 일본 유학시절 ‘조선 삼재(三才)’로 불렸습니다. 조선 세 천재 중 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두 사람은 최남선과 이광수였죠. 세 사람은 일본 도쿄에서 만나 문학을 사랑하는 공통점을 서로 확인하면서 교분을 쌓아나갔습니다. 나중에 홍명희는 임꺽정을 써서 작가로 우뚝 섭니다.

동아일보의 첫 신춘문예 실시는 당시 편집국장 겸 학예부장이었던 홍명희(왼쪽)가 주도했다. 홍명희는 최남선 이광수와 함께 '조선 
3재'로 꼽힌 인재였다. 가운데는 1925년 3월 2일 신춘문예 발표를 하겠다는 예고. 오른쪽은 신춘문예에 응모해 동아일보사로 
보내온 원고 뭉치.
동아일보의 첫 신춘문예 실시는 당시 편집국장 겸 학예부장이었던 홍명희(왼쪽)가 주도했다. 홍명희는 최남선 이광수와 함께 '조선 3재'로 꼽힌 인재였다. 가운데는 1925년 3월 2일 신춘문예 발표를 하겠다는 예고. 오른쪽은 신춘문예에 응모해 동아일보사로 보내온 원고 뭉치.
이 해 2월 중순에는 지면에 ‘예고’가 실립니다. 신춘문예 원고가 너무 많이 도착해 심사에 많은 시일이 걸린다며 3월 2일 당선자를 발표하겠다고 했죠.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단편소설은 2, 3등만 선정됐고 시와 가정소설은 3등만 뽑혔습니다. 동화극은 1, 2, 3등이 아예 없고 가작만 나왔죠. 신시와 가극은 가작마저 없었습니다. 동요에서는 1등 ‘소금쟁이’ 외 4편, 2등 ‘연꽃’, 3등 ‘가마귀’, 가작 14편이 각각 선정됐죠. 전체적으로 응모작들의 수준이 미흡했던 모양입니다. 그래도 시의 김창술과 동화극의 윤석중은 이름을 알리는 작가가 됩니다.

오른쪽은 동아일보 1925년 3월 2일자 5면에 실린 신춘문예 당선 발표 알림. 당선 상금은 3주일 후에 주겠다는 안내가 마지막 부분에 적혀 있다. 왼쪽은 3월 9, 11, 13일자 6면에 각각 실린 동요부문 당선작.
오른쪽은 동아일보 1925년 3월 2일자 5면에 실린 신춘문예 당선 발표 알림. 당선 상금은 3주일 후에 주겠다는 안내가 마지막 부분에 적혀 있다. 왼쪽은 3월 9, 11, 13일자 6면에 각각 실린 동요부문 당선작.
오직 동요부문만 유일하게 온전한 수상자를 배출했을 뿐더러 3월 9일에는 심사후기까지 실렸습니다. 수상작 모두 어떤 동요무대에 내놓아도 제일류가 될 것을 깊이 믿는다는 칭찬 일색이었죠. 특히 1등으로 뽑힌 한정동의 작품은 ‘소금쟁이’가 제일 낫지만 나머지 4편도 세 번 읽으면 세 번 감탄할 정도의 귀한 작품이라고 극찬했습니다. 이렇게 동요를 우대(?)한 배경은 1922년 제2차 조선교육령으로 일본어를 국어로 더 긴 시간 배워야 하는 우리 어린이들에게 우리 말과 글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주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보입니다.

그런데 한정동의 초대 동요 수상작 ‘소금쟁이’는 이내 거센 논란에 휩싸입니다. 작가로서는 치명적인 비판에 직면하게 됐죠. 이 문제는 다음 기회에 살펴보겠습니다.

이진 기자 leej@donga.com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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