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정제된 문장에 녹인 여성과 고통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6월 12일 03시 00분


◇눈으로 만든 사람/최은미 지음/392쪽·1만4800원·문학동네

“트라우마와 분노가 불면으로, 염증으로, 소화불량으로, 흉통으로 기어코 드러나 그 봄에 우리는 발열 없이 계속 아팠다.”(‘여기 우리 마주’ 중)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걸리지 않고도 느끼는 고통은 어떤 종류의 것일까. 이 책의 두 번째 수록작이자 2021 현대문학상 수상작인 ‘여기 우리 마주’는 자녀가 있는 기혼 여성이 펜데믹 상황에서 느끼는 고립감을 생생히 그린다. 집에서 비누를 만들어 판매한 지 9년 만에 상가에 공방을 차린 화자는 코로나19로 일과 육아 무엇도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불안에 휩싸인다. 학원 차를 운전해 돈을 버는 화자의 친구 수미도 같은 고립감에 시달린다. 두 사람의 심리적 위기가 극단으로 치닫는 과정을 그리며 작가는 한순간도 리얼리티를 잃지 않는다. 어떤 소설은 르포 기사보다 진실에 더 가깝다고 느껴지는데 이 소설이 그렇다.

최은미의 세 번째 소설집인 이 책에는 2016∼2020년에 쓴 단편 9편이 수록됐다. 주로 여성이 가족이나 친밀한 지인들과 관계를 맺으며 겪는 일들에 집중했다. ‘여기 우리 마주’ ‘보내는 이’ ‘운내’가 여성이 비슷한 처지에 놓인 이들과 관계를 맺는 과정을 다뤘다면 ‘눈으로 만든 사람’ ‘美山’ ‘11월행’은 가족에 속한 여성의 모습을 그리는 데 주안점을 뒀다.

‘보내는 이’는 최은미의 서늘한 파괴력이 가장 폭발적으로 구현된 작품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안온해 보이는 두 기혼 여성을 등장시켜 그들의 썩어 있는 내면으로 화면을 조금씩 좁혀 나간다. 화자는 딸의 친구 엄마인 진아에게 병적으로 집착하다가 진아가 남편에게 당해 온 폭력의 실체를 알게 된다.

2017년 젊은작가상 수상작인 표제작 ‘눈으로 만든 사람’은 여성이 성인 남성으로부터 겪는 폭력과 이것이 생애 전반에 미치는 영향, 여성 가족에게만 요구되는 의무감을 그렸다. 정제된 문장으로 폭발적 서사를 만들어내는 최은미의 또 다른 도약을 보고 싶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정제된 문장#여성#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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