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여러 우물 파기를 좋아했다. 무엇에든 쉽게 마음이 동하는 성정과 일단 저지르고 보는 추진력의 합작이었다. 하고 싶은 것과 비례해 벌여놓은 일 또한 증식했으니, ‘시간’은 가장 소중한 자원이었다. 일찍이 쓰기 시작한 일과표는 성년에 이르러 ‘시간관리 내역서’로 자리 잡았다. 나름의 규칙을 가지고 삶을 정돈해오던 하루 24칸짜리 표는, 취업을 하고 자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시간이 줄면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다 근래 다시 쓰기 시작했다. 재택근무가 장기화되면서 내린 일종의 처방이었다. 기존에는 공간의 이동과 그에 따른 시간의 구획이 명확했다. 출근 준비를 하고 회사로 이동해 오전 근무를 하고, 점심에는 근처에서 운동하거나 카페에서 책을 보며 간단히 끼니를 때웠다. 이어 오후 근무를 마치고 퇴근하면, 이때부터 잠들기 전까지가 나의 ‘가용시간’이었다. 주로 저녁을 먹고 책을 보거나 드라마를 보곤 했다. 종종 친구들과 약속을 잡기도 했다. 허락된 자유의 범위는 그 정도가 고작이었다. 주중의 삶이라는 것은 ‘산다’는 것보다는 ‘쉰다’에 가까운 것이었으니까. 내일의 출근을 위한 일종의 대기 시간. 공연으로 치면 백스테이지.
그러나 통근과 약속 없는 삶이란 사뭇 다른 것이었다. 이동이 없어진 만큼 준비하고 오가는 최소 세 시간 이상의 삶이 덤으로 주어졌지만, 그 경계는 불분명했다. 세수만 겨우 하고 파자마를 입은 채 책상으로 출근해 침대로 퇴근하는 일상이 반복됐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대학생 때에나 쓰던 비책을 다시 꺼내든 것이다. 계획, 기록이 거듭되자 나름의 루틴이 생겨났다. 첫째, ‘#논문모닝’. 근무 시작 최소 한 시간 전에 일어나 스트레칭을 하고, 커피를 마시며 책이나 논문을 읽는다. 둘째, ‘#퇴근러닝’. 근무가 종료되면 러닝을 한다. 30분가량 가볍게 뛰고 돌아와 샤워를 하고, 차 한 잔과 함께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거나 공부한다. 이 두 가지만 지켜도 하루가 흡족하다.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알고 보니 이를 대변하는 근래의 키워드가 있다. ‘갓생(God生)’. 강조할 때 사용하는 접두어 ‘갓’과 ‘인생’의 합성어로, 스스로 이상적인 루틴이나 리추얼을 설정하고 실천할 때 이를 ‘갓생산다’고 표현한다. 코로나로 기존 일상에 경계를 짓던 활동들이 무화되고, 외부 활동이 어려워지면서 자체적인 루틴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좋은 습관을 형성하고 주어진 하루를 보다 주체적으로 관리함으로써, 일상 속에서 작은 성취감을 느낀다.
코로나 이전이 취향, 여행으로 대변되는 ‘욜로’의 시대였다면 코로나 이후는 ‘갓생’의 시대이다. 얼핏 상반돼 보이나 발로는 같다. 스스로에게 집중하고, 작은 것에서 행복과 성취를 발견하는 마음. 다만 그 에너지의 방향이 다르다. 명상, 일기 등 전에 없던 키워드들이 눈에 띈다. 불가피한 신체 구속이 의도치 않은 정신 도야를 가져다준 듯해 반갑다.
극도의 자율 속, 하루를 지키는 것은 결국 사소하고 건강한 루틴이다. 그것들이 모여 단단한 생활을 이루고 나아가 확실한 행복을 가져다줄 것을 알기에, 오늘도 졸린 눈을 비비고 책상 앞에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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