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아침에 개회될 대회는 상부의 명령으로 금지한다!’ 이 한마디가 전부였습니다. 불과 11시간 후면 열릴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를 열지 말라는 일방통보였죠. 이 대회는 1925년 4월 20일 오전 10시에 개막할 예정으로 2개월여 전부터 준비했습니다. 전국 곳곳에서 참석자들이 경성에 이미 도착해 기대감을 품은 채 시작을 손꼽아 기다리는 중이었죠. 이런 판국에 ‘개최 불허!’는 날벼락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1924년 말 출범한 사회주의 사상단체 화요회는 이듬해 2월 초 행사를 추진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사상‧농민‧노동‧청년‧여성‧형평 등 각 단체가 모여 운동의 통일과 방침을 토의하자는 취지였죠. 2월 중순 행사 명칭을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로 하고 준비위원회를 구성하면서 속도가 붙었습니다. 한편으로 일제 경찰의 움직임을 신경 쓰지 않은 건 아니었습니다. 이리저리 탐문한 결과 일제 경찰은 대회를 불허한다는 내색을 비치진 않았죠.
물론 총독부와 경찰로서는 4월이 매우 불온한 달이었습니다. 4월 15~17일 전조선기자대회가 열렸고 20, 21일에는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가, 24, 25일엔 전조선형평사 총회가 이어졌죠. 5월 1일은 메이데이, 즉 노동절이었습니다. ‘요시찰인’들이 속속 경성으로 모여들면서 뭔가 큰일이 일어날 듯한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었죠. ‘가뜩이나 신경이 예민한 경찰당국에서는 지금 극력 경계 중’ ‘자지도 쉬지도 않고 활동 중’이라는 보도가 나올 정도였습니다.
425개 단체 대표 508명이 참가하기로 한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주최 측도 트집을 잡히지 않으려고 조심조심했습니다. 본정경찰서 고등계주임이 ‘대회 전에 미리 과격분자를 검사한다는 등의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당일 회장 안팎은 그렇게 엄중히 경계하지 않겠다’고 밝혀 안심했을 법도 합니다. 하지만 개막 전날 밤 본정경찰서 고등계가 ‘금지!’를 통보하면서 뒤통수를 얻어맞은 꼴이 되고 말았죠.
경찰은 정사복 인력을 대회장에 배치해 불허 사실을 모른 채 모여드는 참석자들을 해산시켰습니다. 한술 더 떠 친목회나 다과회 형태로 행사를 대체해도 안 된다라고 엄포를 놓았죠. 개최 협상에 실패한 교섭위원들은 ‘도대체 아이들 일 같습니다. 그들의 심사를 알지 못하겠습니다’라며 어이없어했습니다. 동아일보는 사설에서 ‘언론, 집회에 대하여 취하는 방침이 오직 금지와 중지에 있는 것은 총독부 경무당국의 상습적 악벽’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분을 참지 못한 200여명은 이날 밤 종로 3정목에서 붉은 기 5개를 들고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만세’ ‘무리한 경찰의 압박에 반항하자’를 외치며 행진을 벌였습니다. 군중 수천 명이 가세했죠. 경찰은 곤봉으로 닥치는 대로 후려쳐 해산시키고 주모자를 체포했습니다. 경찰은 신문사 사진기자들까지 구타하고 카메라를 부순데다 사진 건판을 압수했습니다. 신문사 측이 항의하자 ‘앞으로 위험한 곳에 접근하지 말라. 접근한다면 위험을 각오하라’라며 오히려 위협했죠.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의 이면에는 다른 사연도 있습니다. 사회주의세력의 분열이었죠. 대회를 주도한 화요회는 또 다른 사회주의 사상단체 서울청년회와 맞서고 있었습니다. 서울청년회 쪽이 1925년 1월 전조선노동교육자대회를 추진하자 화요회는 한 달 뒤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로 맞불을 놓았던 겁니다. 두 단체의 토대인 조선노농총동맹도 쪼개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역 단체들도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찬성, 반대를 놓고 서로 으르렁거리며 비난했죠.
동아일보는 3월 20~23일 4회 연속 사설에서 분열상황을 지목해 ‘자승자박이라기보다 자인자살’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자기 칼로 자기 목숨을 끊는 짓이라는 지적이었죠. 사설은 ‘과거의 모든 사실을 냉정히 생각해 보라. 남이 우리를 죽였느냐? 우리가 우리를 죽였느냐?’라며 대회가 유종의 미를 거두도록 하라고 호소했습니다. 하지만 동아일보를 개량주의 세력으로 손가락질하던 이들은 이 고언을 귓등으로 들었을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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