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8월 말 경성부민에게 학교비 납부고지서가 도착했습니다. 경성부는 지금의 서울시이고 학교비는 교육세로 보면 됩니다. 그때는 경성부민을 형편에 따라 1~50등급으로 나누고 살림살이가 여유 있을수록 누진율을 적용해 등급별 학교비를 정했죠. 이완용은 민영휘와 함께 5등급이 적용돼 학교비 3885원40전을 내라고 했습니다. 3885원은 현재 3500만 원쯤 됩니다. 당시 1~4등급은 해당자가 없었고 5등급이 최고 부자였던 셈이죠.
일제는 일본에서는 의무교육을 실시해 공립학교 운영비의 절반 정도를 국비로 지원했습니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수익자 부담원칙’을 거론하며 학교비를 내라고 했습니다. 학교비를 가구마다 등급별로 나눴기 때문에 ‘학교비 호별할’이라고 불렀죠. 일제는 이 돈 말고도 주민세 격인 호세와 주택세인 가옥세, 토지세인 지세에 각기 일정률을 적용한 부과금을 걷어 학교비로 썼습니다. 이 부과금과 호별할로도 모자라자 지방자치단체별로 기부금을 또 걷었죠.
이완용은 ‘경성 Top 2’의 부자로 공인받았지만 제1기분 고지서를 받은 바로 다음날 돌려보냈습니다. 이듬해인 1925년 3월에 경성부가 보낸 제2기분 고지서 역시 반환했죠. 금액이 너무 많다는 불만 표시가 분명했습니다. 당황한 쪽은 경성부였죠. 상대가 대한제국 총리대신을 지냈고 한일병합의 1등 공신인데다 조선 귀족 중 제일 높은 후작에, 중추원 부의장인 이완용이었으니까요. 이완용의 아들인 남작 이항구도 아버지처럼 고지서를 물렸습니다.
경성부는 당황했지만 꿀리지는 않았습니다. 재산 조사를 잘못했나 싶어 재조사까지 해보았으나 제대로 부과했다고 자신했거든요. 그래서 기한 내에 내지 않으면 재산을 차압하면 된다고 실무자들은 자신만만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인 경성부윤 다니 다키마는 “(이완용이) 재산을 어디다 갖다 뒀는지 잘 조사할 수가 없다. 생활정도와 의식범절이 생각보다 검소하다”며 어떻게든 받아내겠다고 하면서도 말꼬리를 흐렸습니다.
납부기한인 6월 말이 지나자 실상이 드러났습니다. 경성부가 이완용을 5등급에서 10등급으로 낮춰줬죠. 금액은 3885원40전에서 1631원20전으로 줄었고요. 이완용은 감액 통보를 받은 즉시 납부했습니다. 경성부윤 다니는 이렇게 처리한 뒤 평북지사로 갔습니다. 후임자한테 부담을 안 주겠다는 갸륵한(?) 마음이었겠죠. 하나 궁금한 건 사립학교를 세워 2세 교육에 앞장선 부자들도 더러 있었는데 이완용은 왜 그렇게 인색했을까 하는 점입니다. 자기 손자들은 일찌감치 일본 유학을 보내놓고선….
경성부의 할인 조치는 일파만파의 반발을 불러왔습니다. 학교비 결정에 자문하는 학교 평의원회는 ‘우릴 뭘로 보고 맘대로 깎아줬느냐’며 펄펄 뛰었죠. 항의 시민대회를 열겠다고 했고 총사퇴 카드까지 꺼내들었습니다. 학교비 4원 중 2원을 마저 내지 못한 한 부인은 경성부가 집에 있는 풍금에 차압 딱지를 붙이자 “부자는 깎아주고 가난뱅이는 차압을 하니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 이완용도 경성부민이고 나도 경성부민이다”라며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이완용 할인 조치’로 적지 않은 경성부민들도 덩달아 학교비를 안 내려고 하는 바람에 두고두고 악영향을 미쳤습니다. 동아일보는 사설에서 ‘경성부 조사가 5등급과 10등급을 구별할 수 없었다면 경성 30만 주민의 생명과 재산을 위해 하루라도 그런 무책임한 자의 존재를 참을 수 없다. 만일 그렇지 않고 권력이나 정실에 의해 이렇게 되었다면 이 이상 가는 악정(惡政)이 어디 있는가’라고 비판했습니다.
학교비 할인 파동 이듬해 이완용은 69세로 집에서 숨졌습니다. 일본 천황이 최고 훈장을 수여했고 장례 행렬만 4㎞ 넘게 이어졌죠. 천하의 명당이라는 곳에 묻혔고요. 살아선 지독하게 돈을 모았고 죽어선 명당을 차지했지만 평안했을까요? 매국노 손가락질과 봉분 훼손으로 훗날 증손자가 무덤을 파헤쳐 유골을 화장했습니다. 후손들은 뿔뿔이 흩어졌죠. 이완용의 땅을 찾겠다는 뒤늦은 시도는 특별법으로 무산됐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반면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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