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투자 유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장기투자와 단기투자. 속된 말로 손해를 봐도 끝까지 버티는 ‘존버’와 이익이 나지 않으면 빨리 팔아버리는 ‘손절’이다. 주식에 정답은 없다. 비싼 가격에 샀지만 버티다 결국 수익을 낼 수도 있고, 손해를 받아들이고 포기한 뒤 다른 종목에서 더 큰 수익을 낼 수도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 태도에도 두 가지가 있다. 버틸 것이냐, 도망칠 것이냐. 우리 사회는 버티는 데 더 큰 점수를 부여한다. 인내는 미덕이지만 중도에 탈출하는 건 나약함이다. 그런데 이 에세이는 반대로 말한다. 도망은 비겁하거나 연약한 게 아니라 용감한 행위라고 말이다.
저자는 도망이 포기와 다르다고 말한다. 포기가 방향을 잃고 주저앉는 것이라면, 도망은 지금까지 왔던 길에서 방향을 트는 행위다. 저자가 얘기하는 도망이란 ‘죽기 살기로 도망친다’고 표현할 때의 그 도망이다.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문학이 상투성과의 싸움이고, 철학이 기존 세계관에 대한 도전이라는 점에서 저자가 시도한 도망에 관한 재해석은 문학이며 철학이라고 할 만하다.
이 책의 또 다른 매력은 자기 고백적인 글이라는 점이다. 저자의 경험이 진솔하게 배어 있는 글보다 강한 논증 방식은 없다. 그는 자신이 도망친 여러 경험들을 고백한다. 순수문학 출판을 하고 싶었지만 생계 때문에 상업출판으로 도망쳤다. 오랜 친구가 연을 끊자고 했을 때는 용기를 내 잡지 못했다. 저자만의 특별한 경험이라기보다 우리가 일상에서 맞닥뜨릴 법한 일들이다.
저자는 자신이 도망친 결과가 전반적으로 괜찮았다고 평한다. 도망쳐야 하는 이유는 삶과 세상은 늘 변하고 뒤늦게라도 도망치지 않으면 더는 손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밖에 없어서다. 시간이 흐를수록 상처는 더욱 커져 결국 감당할 수 없게 될 수 있다. 그래서 저자는 우리에게 제안한다. 우리 모두 기꺼이 도망자가 되자고.
좋은 에세이가 그렇듯 훔치고 싶은 명문장이 많다. ‘우리가 도망쳐야 하는 진짜 대상은 특정한 사람이나 회사 혹은 상황이 아니라 내 안의 나르시시즘적인 자의식일 때가 더 많다’는 문장이 대표적이다. 이는 잘 도망치기 위해 필요한 건 명분이고, 그 명분은 나의 존엄성과 직결된다는 주장으로도 이어진다.
12년 차 출판 편집자답게 문학 철학 역사를 넘나들며 다양한 저자와 작품을 엮어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도망이 성공하려면 개인적 차원에서 그치지 않고 윤리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점이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는 돈에 관한 철학을 밝힌다. 나를 자립하게 해주고 누군가에게 기여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쳐야지 돈 자체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존엄성을 훼손한다는 것. 존엄성이 무너진다는 건 현명하게 도망치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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