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개성 옷감 ‘송고직’과 양말을 들고 팔러 다닐 때는 막막했습니다. 여학교와 병원 가정집 문을 두드리면서도 부끄러운 마음이 앞섰고 입도 벙긋하지 못했죠. 남자들은 응원했지만 친구나 살림하는 부인들은 오히려 뒤돌아 비웃기도 했습니다. 그럴수록 ‘부끄러움을 없애자, 뜻한 일을 반드시 이루자’는 결심을 굳혔습니다. 한 처녀 포목상이 1925년 되돌아본 과거입니다. 당초 그는 장사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경성 이화학교 고등과 3학년을 마친 뒤 고향인 개성 호수돈여학교로 전학해 학업을 마친 나름 신여성이었죠. 졸업하던 해 3‧1운동이 일어나 정신없이 뛰어다녔고 그해 가을 교편을 잡은 여학교에서 천황 생일행사에 참석하지 말라고 학생들을 선동했다며 면직처분을 받아 인생행로가 멈칫했습니다.
그는 교육자가 되기 위해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났지만 돈이 모자라 학비가 싸다는 중국 쑤저우 징하이여자사범학교로 옮겼습니다. 본과 2학년을 마치고 난징여자대학에 입학하려다 이왕 공부할 작정이라면 미국으로 가겠다며 잠깐 경성에 돌아왔으나 문제는 돈이었죠. 더구나 선동자라는 낙인이 찍혀 여권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이 전환점이 됐습니다. 살림만 하는 주부들을 집밖으로 이끌어 경제활동을 하도록 돕겠다는 마음을 먹었죠. ‘독립적으로 자영자활하는 여성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품었습니다. 그러려면 먼저 자기 자신부터 소매를 걷어붙여야 했습니다. 포목상 하는 남성의 지원으로 가게 한 쪽을 얻어 조선 상품만 팔며 ‘정직한 이윤’을 얻는 사업가의 길을 차근차근 밟아 나갔습니다.
동아일보 1925년 3월 9일자 6면에 나온 여성 사업가 이경지의 사연입니다. ‘구직하는 이를 위하여’ 문패로 7회 연재한 기사는 여학교 교사, 유치원 교사, 은행원, 포목상, 여기자, 공무원, 간호사로 일하는 여성들을 차례로 소개했습니다. 고등보통학교 이상을 나온 여성들이 진출한 직종에서 이미 자리 잡은 선배들의 생활을 전해 취업정보를 주는 기사였죠. 각 회마다 앞부분에는 경성의 주요 여학교 졸업생들의 진로도 알려주었습니다. 동덕여학교, 중앙유치사범과,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배화여학교,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정신여학교, 이화여학교,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순이었습니다.
동아일보는 이 해 1월부터 5월까지 ‘부인면’ 즉 ‘여성면’을 제작했습니다. 4월 말 실었던 ‘조선의 현상과 부인 직업문제’ 2회 칼럼에서 지적했듯이 당시 여성계의 가장 큰 현안이 교육과 직업이었던 점을 감안한 지면이었죠. ‘부인면’ 초기 연재했던 시리즈가 경성부내 여학교 소개였던 점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습니다. 그런데 교육 문호는 여성에게도 점차 열리고 있었지만 직업의 문턱은 여전히 높았죠. 여교사가 드물었고 여성 은행원·사무원만 봐도 희한하다고 여겼으니까요. 1930년 국세조사에서 교사 간호사 같은 공무‧자유업에 속한 경성의 조선여성 비율은 1.63%였습니다. 100명 중 2명도 안 됐죠. 경성의 취업여성 비율이 13.9%에 그쳤습니다. 여의사는 가물에 콩 나듯 있었지만 여변호사는 법으로 금지된 시대였죠.
따라서 교사나 은행원 사무원 등은 1920년대 중반 일제강점기 때 여성들이 진출할 수 있는 최고 직업이었습니다. 스스로 벌어 입에 풀칠해야 하는 여성들은 어찌어찌 하다 공장에 갔습니다. 담배공장 고무공장 정미공장 제사공장 등이었죠. 1925년 1월 1일자 ‘신산한 생활과 비통한 경력담’에서 소개된 여공들은 힘겨운 장시간 노동으로 몸이 점차 망가지는 삶을 살았습니다. 가부장 문화의 집에 돌아가도 일이 쌓여 있었던데다 부모나 자식을 제대로 돌볼 겨를도 없었죠. 아홉 살짜리 아이까지 데려와 일을 시키는 형편이었습니다. 처녀 여공들은 몸이 고달픈 한편으로 길가는 여학생만 보면 치솟는 부러움을 감출 수 없었죠. 증조, 고조할머니들의 땀과 눈물, 의지를 딛고 우리가 여기에 이르렀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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