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일본의 국내 사정을 살펴볼까요? 시기는 1925년 상반기(1~6월)입니다. 1월에 일본은 공산국가 소련과 기본조약을 체결합니다. 두 나라의 국교를 정상화하기 위한 준비 차원이었죠. 일본으로서는 소련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로 했으니 공산주의가 들어오는 길을 원천봉쇄할 명분이 없어졌습니다. 3월에는 보통선거법이 제정됩니다. 25세 이상 남자한테만 선거권을 주었지만 유권자 수가 300만 명에서 1300만 명 수준으로 폭증하게 됩니다. 공산주의 바람을 탄 노동자, 농민이 선거권을 휘둘러 권력이라도 잡으면 어떻게 하느냐? 정계와 관계 등 상층부에 공포심과 위기의식이 퍼집니다. 이래서는 안 된다며 정부가 의회에 내놓은 대안이 바로 치안유지법이었죠.
5월부터 시행된 치안유지법이 겨냥한 대상은 무정부주의자와 공산주의자였습니다. 이 법 제1조는 ‘국체를 변혁 또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할 목적으로 결사를 조직한 자…’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국체’는 간단히 말해서 ‘천황제’를 가리킵니다. 천황제를 뒤엎으려는 집단은 무정부주의자들이 되겠죠. 사유재산제도를 거부하는 집단은 물론 공산주의자들입니다. 두 가지 목적을 위해 조직을 만들거나 가입하면 징역형 10년을 때린다고 규정했습니다. 이 목적을 이루려고 소요 폭행 등 해를 가하거나 선동해도 징역형 10년이었죠. 일본인이건 외국인이건 행위자를 가리지 않았고 이 법을 어기면 나라 안팎 어디서든 잡아다 처벌한다고도 했습니다.
이런 치안유지법에 일본 사회·노동·농민단체는 일제히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연설회와 야외집회, 시위행진 등으로 강력한 거부 의견을 드러냈죠. 2월 19일 도쿄에서 열린 악법반대연설회에서는 한 인쇄공이 유리컵을 깨뜨려 손에 피를 흘리면서까지 결의를 내보였고 참가자 1000여명이 의회로 몰려가다 막아서는 경찰과 난투극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오사카의 젊은 변호사들은 치안유지법이 헌법 제정 정신은 물론 헌법 자체를 부정하고 민법을 침해한다며 반대 목소리를 분명하게 냈죠. 사상(思想)의 자유가 사라진다고 보았기 때문이었겠죠. 하지만 일본 의회는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치안유지법을 통과시켰습니다.
당초 한국인들은 이 법을 강 건너, 아니 바다 건너 불처럼 보았습니다. 일본 국내문제로 여겼기 때문이죠. 더구나 조선 독립이 일본의 국체와 무슨 상관이겠느냐고 판단했고 공산당은 아직 수면 위로 떠오르기 전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이 법을 조선과 대만에도 적용한다는 칙령이 나오면서 발등의 불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장 큰 걱정은 독립운동을 탄압하는데 이 법을 악용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죠. 아니나 다를까 일제는 치안유지법을 독립운동 탄압에 적용할 논리를 개발했습니다. 즉 ‘조선 독립은 일본제국 영토의 참절(僭竊)이고 이는 천황의 통치권 축소이며 곧 국체의 변혁’이라는 논리였죠. ‘참절’은 한 국가의 영토 전부 또는 일부를 장악해 주권행사를 배제하고 존립과 안전을 침해한다는 뜻입니다.
일제는 1907년 신문지법을, 1909년에는 출판법을 시행했습니다. 먼저 조선의 언론을 틀어막았죠. 1919년 3·1운동이 터지자 총독부는 제령7호를 만들었습니다. 정치 변혁을 목적으로 다수가 함께 들고 일어나거나 일어나려고 한다면 징역형 10년을 부과하도록 했죠. 이미 우파건 좌파건 독립운동을 옥죄는 법이 촘촘한 판에 치안유지법을 덧대 빈틈을 아예 없앤 꼴이었습니다. 더 우려스러운 일은 일제가 이 법을 확대 해석해 과잉 집행할 가능성이었죠. 동아일보가 5월 16일자 사설에서 ‘조선에서는…오직 관료배의 기분과 감정이 법률이 되며 선악의 표준이 되며 권력의 원천이 되고’ 있다고 지적한 이유였습니다. 일제가 ‘다 내 그물 속으로 들어오라’고 하면 빠져나갈 방법은 없으니까요. 우려는 곧 현실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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