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역사는 누가 쓰는가’라는 궁금증을 품게 됩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구절이 심심찮게 거론되지만 역사는 역시 살아남은 사람이 쓰겠죠. 그렇지만 당장 역사를 강제하는 힘은 승자에게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일제강점기 때도 그랬습니다. 총독부는 1915년 중추원을 중심으로 ‘조선반도사’ 편찬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조선반도사는 통사(通史), 즉 한민족의 전체 시대를 아우르는 역사책을 목표로 삼았죠. 하지만 ‘(조선인들을) 충량한 제국신민에 부끄러움 없는 위치로 돕고 이끌기 위하여’라는 목적을 분명히 내세웠습니다. 역사 서술이 곧 식민지 통치수단의 하나가 된 꼴이었죠.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민족의 활동무대를 한반도로 좁혀놓으려는 의도도 드러납니다.
그러나 조선반도사는 흐지부지됐습니다. 1919년 일어난 3·1운동 때문이었죠. 일제는 역사 조작을 통해 조선을 일본에 동화시키기에는 한민족의 뿌리가 튼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조선과 일본의 조상이 같다거나 일본이 조선의 문명개화를 이끌어야 한다는 주장이 쉽사리 통하지 않았죠. 총독부는 방향을 틀었습니다. 역사 서술에서 사료(史料) 수집으로요. 1923년 조선사편찬위원회를 출범시켰고 1925년에는 조선사편수회로 조직을 확대했습니다. 회장은 내내 정무총감이 맡았죠. 이 해 10월 조선사편수회 제1회 회의를 열어 8년을 시한으로 ‘조선사’를 발간하겠다는 청사진을 내놓았습니다. 동아일보 10월 13일자 1면의 ‘朝鮮史는 七時代로 區分’은 이 첫 회의를 소개한 기사입니다.
일제가 ‘조선사’를 통사가 아니라 자료집 형태로 내겠다고 한 배경에는 능력 부족도 작용했습니다. 조선의 반만년 통사를 쓸 만한 일본 전문가가 영 부족했거든요. 당시엔 기껏해야 고대사나 일본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조선 연구가 나오는데 불과했습니다. 조선사편수회를 지휘했던 구로이타 가쓰미(黑板勝美)는 고문서학의 권위자였죠. 하지만 자료집 편찬의 바탕에는 한민족의 역사를 일본 밑에 영원히 묶어두려는 무서운 장치도 깔려 있었습니다. 마치 일본에서 메이지유신을 통해 중앙권력이 지방영주를 복속시켜 나갔듯이 우리 역사도 일본제국의 하위부문으로 끼워 맞추는 틀을 만들려 했던 것이죠. 일본은 중앙, 조선은 지방이라는 구도를 고정하기 위해 활용할 사료를 모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숙신(肅愼)은 조선사의 기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발해 같은 것도 조선사에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이것들은 어떻게 선택할 방침이십니까?’ 육당 최남선이 조선사편수회 제4회 회의에서 꺼낸 질문입니다. 최남선의 조선사편수회 활동은 친일 행적의 하나로 꼽힙니다. 하지만 최남선은 조선사편수회가 ‘조선사’의 시작을 삼국시대 이후로 잡으려는 시도에 이의를 제기했죠. 말하자면 안에서 싸운 셈입니다. 단군 연구의 대가인 최남선이었으니까 가능한 문제 제기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조선사편수회는 연 월 일이 분명한 사실만 싣는다는 실증주의를 앞세워 고조선을 제외시켰습니다.
1933년까지 ‘조선사’를 내겠다는 계획은 5년이 더 지난 1938년에야 35책으로 마무리됐습니다. 지방은 물론 일본 만주까지 가서 고문서 문집 영정 고지도 탁본 등을 사들였죠. 고문서만 6만1500장에 가까운 분량이 수집됐다고 합니다. 이렇게 펴낸 ‘조선사’는 해방 이후에도 오래도록 영향을 미쳤습니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일본 연구자들은 ‘조선사’를 밑그림으로 해서 조선왕조실록을 읽었다고 하니까요. 조선사편수회에서 활동했던 일본 연구자들은 한국 국사편찬위원회를 조선사편수회의 후속기관쯤으로 볼 정도였습니다. 해방 후 한국의 역사연구도 ‘조선사’의 그늘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한 번 잘못 꿰어진 단추를 바로잡기가 얼마나 힘든지 보여주는 분명한 사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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