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스물넷. 취업 준비를 위해 달릴 때다. 학점과 토익 점수는 기본, 여기에 자격증까지…. 이른바 스펙을 갖춰 놓지 않으면 취업시장에서 살아남기 힘든 시기에 생뚱맞은 선택을 했다. 남극에서 요리사로 일해 보는 것. 남극 장보고과학기지 조리지원 대원으로 5개월간 일한 경험을 지난달 15일 에세이 ‘재밌으면 그걸로 충분해’(상상출판)로 펴낸 김인태 씨(26·성균관대 글로벌경제학과 3학년) 이야기다.
그는 지난달 29일 전화 인터뷰에서 “2019년 여름방학 때 남극에서 냉면을 만들어 먹는 내용의 공상과학(SF) 소설 ‘남극낭만담’을 읽다 문득 남극에 가면 재밌겠다 싶었다”고 말했다. 한국해양과학기술원 극지연구소는 남극의 세종과학기지와 장보고과학기지 근무 대원을 매년 뽑는다. 대부분 해당 분야에서 5년 이상의 경력을 요구하지만 조리지원 업무는 자격증과 1년 이상의 조리 경력만 있으면 된다. 그는 군 전역 후 한식조리기능사 자격증을 땄고, 틈틈이 레스토랑에서 일해 그 경력이 인정됐다. “원래 저는 안전 지향적인 삶을 살았는데 ‘지금 남극을 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어요. 남극기지에 미친 척하고 지원했는데 덜컥 합격해 버렸습니다.”
한국을 떠나 비행기로 사흘을 이동한 끝에 2019년 11월 남극에 도착했다. 온통 새하얀 남극의 풍경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할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재미 삼아’ 떠난 이곳은 휴양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습도가 15% 이하라 피부가 갈라지기 일쑤였고 강한 추위에 몸이 벌벌 떨렸다. 여름인데도 온도는 영하 15도 안팎. 장갑 없이 맨손으로 30초 넘게 있으면 동상에 걸릴 정도였다.
매일 오전 5시 반 기상해 무거운 음식 재료를 옮겨야 했다. 조리담당 대원 3명이 나머지 대원과 방문객까지 모두 100여 명의 세 끼를 책임졌다. 쉬는 시간을 제외하면 주 7일, 하루 12시간씩 일했다. 그는 “왜 사서 이 고생을 하나 싶었다. 도착한 지 사흘 만에 우울증이 왔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함께 근무하는 대원들과 어울리며 남극의 삶에 점차 적응했다. “일이 힘든데 네가 해주는 밥을 먹는 낙으로 산다”는 대원들의 격려에 힘이 났다. 휴일에는 대원들과 펭귄을 보거나 다른 해외 연구소를 방문하기 위해 하이킹을 떠났다. 책을 많이 읽고 생각했다. 틈틈이 일기도 썼다. 그는 “한국에서 대학생으로 살면 모든 행동을 취업에 도움이 되는 스펙이냐는 잣대로만 판단하지만 남극에서는 이런 구분이 무의미하다”며 “돈 쓸 곳도 없는 남극에서 내가 무얼 위해 달려왔고 어디로 가야 할지 깊이 고민했다. 결국 내가 지금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경험을 쌓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남극에서 근무를 마친 그는 지난해 4월 귀국했다. 바로 복학하진 않았다. 무슨 일을 하며 살고 싶은지 고민하며 책을 읽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남극에 다녀온 뒤 무엇이 바뀌었을까.
“저는 취업이나 결혼을 포기한 ‘N포’나 내 인생은 한 번뿐이라고 외치는 ‘욜로(YOLO·You Only Live Once)’가 아니에요. 오직 재밌을 것 같아서 남극으로 떠난 ‘재미주의’에 가깝죠. 크게 변한 건 없지만 제 생각에 확신은 생겼어요. 재밌는 일을 열심히 한다면 언젠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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