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더워서 씹기조차 귀찮던 어느 날 서울 종로구 익선동으로 향했다. 점심시간에 맞추어 도착했는데 소나기가 후두둑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비를 맞으면서도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선 곳이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오늘 뭐 먹지’라는 고민을 해결해 줄 프랑스 가정식 레스토랑이었다. 한옥 처마 아래 ‘르블란서’라는 현판이 있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핫’한 곳이라 20, 30대 손님만 있을 줄 알았는데 10대부터 60대까지 가족이 도란도란 음식을 먹는 풍경이 펼쳐졌다.
이곳은 프랑스 요리를 한국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조리해 양식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도 편안히 즐길 수 있다. 프렌치 요리의 생명은 소스인데 시판 제품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정성 들여 만든다. 버터나 생크림을 많이 쓰지 않아 느끼함이 없고 대파나 마늘, 토마토를 많이 써서 음식 맛이 개운하다. 테이블에 앉으면 식전빵으로 통밀 캄파뉴를 따끈하게 구워 버터와 내어준다. 무엇을 주문할까, 고민을 오래 할 필요는 없다. 옆 테이블과 앞 테이블 하나같이 주문하는 메뉴가 있으니 바로 항정살 스테이크다.
푸짐하게 나오는 항정살은 먹기 좋은 크기로 조리되어 나이프를 쓸 필요가 없다. 한 점 가져다가 입에 넣으니 향긋함이 감돌았다. 항정살 부위는 지방과 살코기가 겹쳐 있어 1000겹의 밀푀유가 연상된다. 핑크빛 살코기는 씹을수록 육즙이 터지고 식감이 연하다. 그렇다고 지방이 너무 많은 것은 아니다. 같은 양을 비교했을 때 지방 함량은 삼겹살 부위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예로부터 도축장에서 돼지를 잡으면 항정살은 따로 떼어 두었다가 주인이 혼자 먹었다는 말이 있다. 돼지 한 마리당 200g 정도 나오는 특수 부위다.
이곳은 항정살의 매력을 잘 살렸다. 저온에서 천천히 익히는 수비드 방식을 사용해 지방질은 고체와 액체 사이에서 살코기 사이에 머물러 있다. 겉은 고온에서 짧은 시간 구워낸다. 이렇게 하면 도톰한 고기가 바삭하게 씹히다가 지방질이 육즙으로 추릅 빠져나오니 전체적인 식감이 쫀득하다. ‘겉바속촉’ 잘 구워진 녹두전을 먹는 기분이랄까.
항정살 아래에는 밥 대신 먹을 수 있는 매시트포테이토가 푸짐하다. 담백하고 포슬포슬한 맛에 여름 감자의 향긋함이 어려 있었다. 고기 위로는 대파가 수북하게 쌓여 있는데 고기 한 점을 먹은 후 감자에 대파를 버무려 접시에 깔려 있는 소스에 비벼 먹으니 개운하게 입안이 정리됐다.
한옥의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가정식을 먹는 시간은 참으로 편안했다. 테이블 와인은 2만, 3만 원대로 구비돼 있고, 글라스로 주문해도 잔을 가득 채워준다. 스테이크 소스가 맛있어서 빵을 찍어 먹고 싶다고 하자 캄파뉴 몇 조각을 다시 구워 주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익선동, 한국적인 공간에서 프랑스 가정식을 즐기니 시공간을 초월하는 짜릿함이 있었다.
댓글 0